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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6・25 전쟁

6・25 전쟁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가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드는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1950년 8월, 학도 의용군 이우근이 쓴 이 편지에는 전장 한가운데 있는 소년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6・25 전쟁 당시 수많은 청소년이 학도병, 학도 의용군 등으로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썸네일 6・25 전쟁
6・25 전쟁

 

전쟁의 배경

     남과 북에 이념과 체제가 다른 대한민국 정부와 북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반도에서는 긴장과 대립이 고조되었다. 냉전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였으나, 남한과 북한에 각각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남북은 서로의 체제를 비난하면서 38도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벌였다. 남한 정부는 국방 경비대를 국군으로 확대, 개편하여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지리산 주변에서 활동하던 유격대를 토벌하고, 좌익 활동가를 색출하여 전향시켰다.

     한편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전차, 비행기 등 무기와 군사적 지원을 받았고, 중국의 내전에 참여하였던 조선 의용군 등을 인민군에 편입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소련은 북한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였으며, 중국도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한편, 미국은 남한에서 전투 부대를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였다. 북한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 아래 전쟁을 준비하였다. 

 

애치슨 라인 지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전쟁의 전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기습적이고 전면적으로 남침을 감행하였다. 북한군은 치밀하게 준비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차를 앞세워 3일 만에 서울을 차지하고, 빠른 속도로 낙동강 일대까지 진출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요청으로 긴급 소집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한의 남침을 평화에 대한 파괴 행위로 규정하고, 유엔군 파병을 결의하였다. 곧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참전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던 국군과 유엔군은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 상륙 작전을 실시하여 전세를 역전하고,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다. 이어 38도선을 넘어 평양과 원산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쪽 국경에 이르는 등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한은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중국은 10월부터 군대를 보내 북한을 지원하였다. 압록강을 건넌 중국군은 대규모 병력을 앞세워 순식간에 남하하였고, 이에 따라 1951년 1월에는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한강 이남으로 물러났다(1・4 후퇴).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총공세를 감행하여 다시 서울을 탈환하였지만, 전쟁은 38도선 부근에서 북한군, 중국군과 서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이어갔다. 

 

 

 

 

정전 협정 체결

     전쟁이 38도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지자 소련이 먼저 정전 협정을 제안하였다. 6・25 전쟁이 세계 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한 미국도 이를 받아들였다. 1951년 7월부터 당사국들 사이에 정전이 모색되었다. 그러나 군사 분계선 설정, 포로 송환 방식에 대한 이견 등으로 정전 회담은 2년여 동안 계속되었다.

     정전 회담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38도선 부근에서는 계속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한편 이승만 정부는 정전에 반대하여 북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기도 하였다.

     회담이 시작된 지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3년여 만에 6・25 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다. 정전 협정에는 중립국 감독 위원회와 군사 정전 위원회, 비무장 지대 설치가 합의되었다. 정전에 반대했던 이승만 정부도 미국에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1953), 경제 원조 등을 약속받고 정전 협상을 준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쟁의 영향

     6・25 전쟁은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된 대규모의 국제전이었다. 전쟁으로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수백만 명이 희생되었으며, 수많은 이산가족과 전쟁고아가 발생하였다. 남북한이 받은 경제적 타격도 매우 컸다. 농촌이 황폐해지면서 식량 생산이 급감하였고, 공장 등 산업 시설과 사회 기반 시설이 파괴되어 물자가 부족해졌다. 

     한편, 전선이 한반도 전역을 오르내리면서 상대편에 협조하였던 사람들을 처형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당시 북한군은 지주와 자본가 및 군인과 경찰 가족들을 처형하고, 북으로 퇴각하면서 많은 지식인과 정치인 등을 끌고 갔다. 또한 국군과 경찰은 다수의 국민 보도 연맹원, 고도소 수감자 등을 처형하였다. 월남자나 월북자의 남겨진 가족들은 감시와 차별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남북의 집권자는 이러한 상황을 독재 정치를 강화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승만정부는 반공을 더욱 강조하여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북한의 김일성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정적들을 숙청하고, 유일 체제를 확립하였다. 

     전쟁으로 민족의 동질감이 약해지고, 남북 사이의 적대감이 깊어지면서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었다. 전쟁 이후 남북은 무력 통일을 주장하며 대립하였고, 군사력 증강 경쟁을 벌였다. 아직까지도 이산가족 문제와 미송환 포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한편 전쟁 이후 남한에는 한・미 상호 방위 조약으로 미군이 주둔하면서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중국은 참전 후 북한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으며, 일본은 6・25 전쟁 특수로 경제가 성장하면서 아시아의 반공 거점 국가로 자리 잡았다. 

 

부산의 피난민촌 사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