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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전후 남북한의 정치와 경제

전후 남북한의 정치와 경제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양당인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지 못하면 살 수 없다.' 등의 구호를 내세워 이승만 정부에 실망한 국민의 호응을 얻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갈아 봤자 더 못 산다.', '구관이 명관이다', '나라 위한 한평생 합심하여 또 모시자.' 등의 구호를 내걸고 민주당에 맞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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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남북한의 정치와 경제

 

이승만 정부, 발췌 개헌으로 정권 연장

     6・25 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앞세워 정권 연장에 힘썼다. 전쟁 직전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5・10 총선거에 불참하였던 중도파 민족주의자와 정부에 비판적인 무소속 출마자가 다수 당선되었다. 그리고 전쟁 중에 일어난 국민 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폭로되면서 이승만 정부에 대한 여론도 악화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로는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자유당을 창당하여 지지 기반을 넓히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952년 5월 부산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을 동원하여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이 탄 통근 버스를 강제 연행하였으며, 일부 국회의원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하였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 정부는 개헌안을 기립 표결로 통과시켰다(발췌 개헌).

 

야당 통근버스 강제 연행과 발췌개헌 사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반공주의와 독재

     발췌 개헌 이후 이승만은 직선제 선거에서 반공을 내세우면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6・25 전쟁 이후 자유당은 이승만 정부의 장기 집권을 위해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하는 내용의 헌법을 고치려 하였다. 여당이었던 자유당이 1954년 현임 대통령에 한해 연임 제한을 없애자는 내용의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개헌안은 국회 정족수에서 1표가 모자라 부결되었으나 이틀 후 자유당은 사사오입(반올림)의 논리를 내세워 개헌안이 통과되었다고 선포하였다. 

     개헌 후 실시된 1956년 제3대 대통령 및 제4대 부통령 선거는 일부 지역에서 개표가 중단되는 등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무소속 후보로 나선 조봉암이 예상보다 많은 표를 얻었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이 자유당의 이기붕을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나선 조봉암은 평화 통일을 구호로 내걸고 예상보다 많은 표를 얻어 이승만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부는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탄압하였고(진보당 사건), 조봉암에게 국가 보안법 위반과 간첩 혐의를 씌워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국가 보안법을 개정하고, 정부에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을 폐간하는 등 언론을 탄압하였다.

     한편 이승만 정부는 동 단위로 국민반을 조직하여 주민을 효율적으로 동원・통제・감시하려 하였다. 국민반을 이용하여 정부의 정책을 선전하였으며, 선거에 국민반 조직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반공을 강조하는 서적과 잡지를 배부하여 반공주의를 강화하고, 국민의 사상을 통제하려 하였다. 

 

 

 

 

전후 복구와 생활의 변화

     6・25 전쟁은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어 물자 생산이 줄어들었고, 농경지가 황폐해져 식량 생산도 급감하였다. 막대한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재정 지출이 증가하여 물가도 폭등하였다. 

     정전 이후 이승만 정부는 경제를 안정시키고, 황폐화된 산업 시설을 재건하는데 힘을 쏟았다. 정부는 일제로부터 압류한 귀속 재산을 민간에 매각하고, 미국에서 들어온 원조 물자를 분배하여 민간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 발전을 꾀하였다. 국민도 전후 복구에 힘써 1950년대 후반에는 주요 산업 시설이 어느 정도 복구되었다.

     전후 복구에는 미국의 원조가 큰 힘이 되었다.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 방지와 인도주의적 목적으로 한국에 원조를 제공하였다. 미국의 원조 중에서 가장 많이 들어온 것은 밀, 사탕수수, 면화 등 농산물이었다. 미국이 제공한 잉여 농산물은 한국의 식량난 해결과 제분업, 제당업, 면방직 공업 등 이른바 삼백 산업과 같은 소비재 산업 발달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미국의 농산물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국내 농산물 가격이 떨어졌고, 미과 면화 등 농작물 생산이 큰 타격을 받았다. 농촌 경제가 어려워지자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다. 또한, 미국의 경제 불황으로 1950년대 말부터 원조가 줄어들고 유상 차관으로 전환되면서 한국 경제는 위기를 겪게 되었다. 

     한편 귀속 재산과 원조 물자를 민간에 넘기는 과정에서 특정 기업에 혜택이 집중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삼백 산업을 중심으로 독점적 대기업이 형성되었고, 정경 유착의 문제가 나타났다. 

     6・25 전쟁 중 피란민이 도시로 몰리고, 도시를 중심으로 복구가 이루어지면서 인구의 도시 집중이 심화되었다.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은 대부분 날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갔고, 상하수도 시설이 없는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자녀 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며, 이 시기 초등 의무 교육의 실시와 공립학교의 설립은 문맹률을 낮추는 데 기여하였다. 

     전쟁 중 많은 남성이 죽거나 다치면서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커졌다. 또한 많은 사람이 이주하면서 촌락 공동체 의식이 약해졌다. 이 무렵 미국의 원조 과정에서 서양식 노래와 춤을 비롯한 미국식 대중문화가 유입되어 전통적인 가치관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북한의 사회주의 독재 체제 확립과 전후 복구

   1948년 정부 수립 초기에 북한은 김일성의 갑산파, 김두봉의 연안파, 허가이의 소련파, 박헌영의 남조선 노동당파 등 다양한 세력의 연합이었다. 김일성은 6・25 전쟁 과정에서 반대 세력의 일부를 제거하였고, 전쟁 이후에는 박헌영과 남로당 계열에 전쟁 패배의 책임을 물어 제거하고, 중국 및 소련과 가까운 연안파와 소련파의 주요 인물을 제거해 나가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였다.

     한편 스탈린이 사망한 뒤 소련에서는 스탈린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이 영향으로 북한 내에서도 1956년 연안파가 김일성의 권력 독점과 사회주의 건설 정책을 비판하며 권력을 장악하려 하자, 김일성은 이를 기회로 삼아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진행하였고(8월 종파사건), 중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틈을 타 1인 독재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6・25 전쟁으로 북한 전역은 거의 폐허가 되었고, 북한 경제는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북한은 생산 수준을 전쟁 이전 수준으로 높이려 전후 복구 3개년 계획(1954~1956)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중국과 소련의 원조로 목표를 조기 달성하였다고 발표하였지만, 실제로는 석탄・시멘트・곡물 생산 등 대부분이 계획에 미달하였다.

    1956년부터 북한은 대중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천리마 운동을 펼쳤고, 1957년부터는 사회주의 경제의 공업 기반 구축과 주민의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목표를 두고 제1차 5개년 계획에 착수하였다. 초반에는 천리마 운동이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여 제1차 5개년 계획의 목표를 1년 앞당겨 달성하였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천리마운동은 자본 투자와 기술 혁신 없이 노력 동원과 속도 경쟁에만 의존하였다는 한계가 있었다.

     한편 북한은 6・25 전쟁 이전에는 사유 재산을 상당 부분 인정하였으나, 전후 복구 과정에서 농지를 협동조합 소유로 전환하는 등 사회주의 경제 체제로 급속하게 전환하였다. 그 결과 1958년 말에는 농업 부문에서 토지 등 모든 생산 수단을 통합하고, 노동에 의해 분배받는 사회주의적 소유 형태를 이루었다.

 

천리마 운동 포스터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