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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속으로] 콜럼버스

콜럼버스  |  신항로를 통한 역사의 전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0년 10월 31일 - 1506년 5월 20일)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이자 항해가이다. 서회항로 개척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콜럼버스는 1492년에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아 대서양 항해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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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 신항로를 통한 역사의 전환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

     중세 유럽인들은 지구가 구형임을 알고 있었고, 대서양을 건너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아시아에 도달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항해 거리에 대한 계산 오류로 서회항로 개척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1485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서회항로 탐험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아프리카 서해안 탐사와 동방무역항로 개척을 준비 중이던 주앙 2세는 서회항로 개척 제안을 거절했고, 콜럼버스는 새로운 후원자를 물색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갔다.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스페인 부부국왕은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의 서남단에 있는 희망봉을 발견하고 귀국했다는 소식(1488)에 자극을 받아 왕실위원회의 사업성이 없다는 결론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사업추진을 결정하였다.

 

 

 

 

제1차 항해 (1942~1943)

     1492년 8월 3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3척의 선박과 함께 팔로스 항을 떠나 일주일만에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했다. 이후 한 달간의 머무르며 보급 작업을 했고, 9월 8일 출항하여 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한 달이 넘도록 땅이 보이지 않자 선원들의 반란이 일어나 항해를 이어가기 위한 설득이 필요했다. 최종적으로 10월 12일, 33일 만에 바하마 제도를 발견하였고, 이를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라 명명하고 스페인 왕의 영토로 선언했다. 콜럼버스는 그 후 쿠바와 에스파뇰라섬을 탐험했지만 금과 향신료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원주민을 인디오(indio)라 칭하였다.

     1493년 1월에 귀국을 준비하고 에스파뇰라섬에 요새를 건설하여 약 40명의 선원을 현지에 남겼다. 순풍이 불기 시작한 2월에 귀국을 시작하여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결국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입항하게 된 콜럼버스는 포르투갈과의 영토 분쟁 등 다양한 사건들을 겪으며 1493년 3월에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스페인에서는 환영을 받으며 이사벨 1세 여왕과 페르난도 2세 왕에게 탐험 결과를 보고했다.

 

 

제2차 항해 (1493~1496)

     1차 항해 이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빠른 시일 내에 다시 탐험을 원하여 2달 만에 왕명으로 2차 항해를 시작했다. 1493년 9월 25일에 출발한 이 항해는 금을 찾기 위한 것이었고, 1,200명이 참가하며 17척의 대선단이 꾸려졌다. 11월 3일에 서인도제도에 도착했으나 1차 항해 때 남겨두었던 식민지 개척자들이 모두 사망한 후였다. 콜럼버스는 식민지 요새인 이사벨라 시를 세우고 식민지 총독으로서 스페인에서 건너온 경영자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원주민들을 경작과 금 채굴에 강제 동원했다. 그러나 금 생산이 부족하자 원주민을 살육하고, 노예로 만들면서 학대하기 시작했다.

     이후 쿠바와 자메이카 해안 지역을 탐사하였고, 보급품을 요청하면서 금과 향신료가 많다는 보고를 하며 실상을 왜곡하였다. 또한 스페인 왕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을 생포하여 스페인으로 송출했다.

     1496년 6월 11일에 귀국했으나 중간보고서와는 달리 특별한 성과가 없자 크게 문책을 당했고 이로 인해 콜럼버스는 왕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되었다.

 

 

 

 

 

제3차 항해 (1498~1500)

     제3차 항해에서 콜럼버스는 금을 찾기 위해 남아시아를 목표로 삼았으며, 남아시아의 거주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칼데아 신아람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선원 두 명을 함께 데리고 갔다. 유럽인들은 강렬한 태양에 의해 금이 생성된다고 생각하여 적도 부근에 금이 풍부하리라 예상했고 적도 부근으로 내려갔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로 인해 무풍지대(無風地帶)에 진입하는 위험한 항로를 선택했고, 예상대로 무풍지대에 빠지게 되었지만, 폭풍우로 인해 벗어날 수 있었다.

     남미대륙으로 항해한 결과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오리노코강 하구를 발견했고, 콜럼버스는 오리노코강 하구를 에덴동산의 관문으로 착각했다. 항해 중 에스파뇰라에서 반란이 발생했고, 이를 알게 된 왕의 조사관에 의해 콜럼버스는 체포되어 쇠사슬에 묶여 스페인으로 송환되었다.

 

 

제4차 항해 (1502~1504)

     1502년 4월, 콜럼버스는 네 척의 카라벨선과 135명의 선원으로 4차 항해를 시작했다. 선원 중에는 동생 바르톨메오와 14살인 둘째 아들 페르난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신임 총독 오반도가 이끄는 경쟁 선단은 32척의 배와 2,500명의 선원을 이끌고 먼저 출발했다.

     콜럼버스는 모로코를 거쳐 6월 15일에 마르티니크에 도착한 후 허리케인을 피하려고 서쪽으로 항해했고, 산토도밍고에 도착했지만 총독 오반도의 입항 거부로 리오 자이나 강어귀에 정박해야 했다. 그 후 자메이카에 잠시 머물고 중앙아메리카를 탐험하여 10월 5일에는 파나마의 알미란테 만을 발견했다. 1503년 6월에는 쿠바 해안에서 폭풍을 만나 자메이카에 좌초하여 1년 동안 고립된 생활을 하다가 1504년 6월에 스페인과 연락이 되어 자메이카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1504년 11월에 스페인으로 귀국했지만 이번 항해에서도 금이나 향신료를 찾지 못하고 특별한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콜럼버스의 말년과 사망

     1504년 11월 26일에 이사벨 1세 여왕이 죽은 후 콜럼버스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고 처우가 나빠졌다. 지위 향상과 처우 개선을 요청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고, 그의 말년은 가난하지 않았지만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던 시기였다.

     1506년 5월 20일에 바야돌리드에서 사망한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탐험한 땅이 인도나 아시아의 일부라고 믿었다.

 

 

항해록과 자료들

     1차 항해를 완료한 콜럼버스는 항해일지를 정리하여 국왕에게 바쳤고, 자신도 필사본을 소장했다. 현재 원본과 필사본은 모두 존재하지 않지만, 『콜럼버스 항해록』은 라스카사스 신부가 1530년 경에 원본을 보고 발췌, 요약한 축약본으로 발견되었다. 이 축약본은 1790년경에 스페인 역사가 나바레테에 의해 인판타도 공작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논란이 있었지만, 연구 결과 진본으로 인정되었다. 이 작품은 콜럼버스의 1차 항해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3차례의 추가 항해에 대한 일지는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콜럼버스가 직접 쓴 여러 편지와 둘째 아들의 기록, 그리고 직접 쓴 『예언서』 및 비망록 등이 남아 있다. 콜럼버스가 독학하며 소장한 책들 중 상당수도 남아 있어, 이는 콜럼버스와 그의 항해에 대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평가

긍정적 평가

     콜럼버스의 탐험과 발견은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인의 활동 무대로 열어주며 미국의 기원을 마련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서양 역사가 대서양 중심으로 확장되고 지중해 중심의 시각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개척열기가 이어졌고 서양 문명이 아메리카 대륙에 이룩하게 되었다. 이 발견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놀라운 지적 자극을 제공하며 '주어진 것'에 대한 회의를 일으키고,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존경을 흔들어 지식인들의 사고 문을 넓혔다.

     콜럼버스는 지구가 구형임을 알고만 있던 중세의 지식인들과 달리, 서회항로를 통해 세계의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그의 뛰어난 사고와 실행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되며, 그의 노력 덕분에 세계사가 새로운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아시아까지의 항해 거리를 잘못 계산한 점도 있었으며, 당시 항해 기술 수준에서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단순한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사명의식과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여 세계를 탐험하려는 의지가 함께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부정적 평가

     20세기에 콜럼버스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의 아메리카 식민지 통치와 원주민에 대한 잔혹한 행위로 인해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 전역에서는 ‘콜럼버스의 날’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고, 몇몇 지역에서는 이를 '원주민의 날'로 대체하기도 했다.

     콜럼버스는 말년에 집필한 『예언서』를 통해 자신의 업적을 숭고한 조력자로서 정당화하며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미화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세습 귀족이 되려는 세속적 열망과 큰 돈을 벌려는 욕망, 아들의 추기경 지위 확보를 위한 국왕에 대한 청탁 행위 등으로 보아 세속적인 동기가 강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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