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민족 운동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개혁
오스만 제국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에 걸친 넓은 영토와 중계 무역의 번성으로 번영을 누렸으나, 18세기 이후 중앙 정치가 부패하고 지방 세력이 발호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또 동양과 서양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영국, 러시아 등 서양 열강의 압박이 심하였다. 특히 러시아가 남하 정책을 펴면서 서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자, 이에 맞선 영국과 프랑스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을 둘러싼 열강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자 제국 아래 묶여 있던 여러 소수 민족도 튀르크족의 지배에 반대하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발칸반도에서는 그리스가 독립을 시도하였고, 상당 정도 근대화에 성공한 이집트도 독립적인 지위를 요구하였다. 결국, 19세기에 들어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의 자치와 그리스의 독립을 허용하였고, 유럽 지역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은 1839년부터 '탄지마트(은혜 개혁)'라고 불리는 근대 개혁을 추진하였다. 탄지마트의 성과가 미흡하자 미드하트 파샤를 비롯한 관료들은 입헌 군주제 실시, 의회 설립 등의 내용을 담은 헌법을 공포하였다(1876). 그러나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일어난 후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와 보수 세력이 헌법을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하여 정치 개혁이 중단되었다.
이후 술탄의 전제 정치가 강화되자 청년 장교들은 청년 튀르크당을 결성하고 무장봉기하여 헌법을 부활하였다(1908). 이들은 근대적 산업 육성, 언론의 자유 보장 등 근대화 정책을 실시하고 외세 배척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청년 튀르크당은 극단적인 튀르크 민족주의를 내세워 제국 내 다른 민족의 반발을 샀다. 또 서양 열강의 이권 침탈이 계속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서서히 무너져갔다.
서아시아의 민족 운동
18세기 이후 아랍 지역은 점차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븐 압둘 아화브는 초기 이슬람교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와하브 운동을 일으켰다. 이는 아랍인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오스만 제국에 반대하는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20세기 전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건설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19세기 초에는 아랍 고전을 연구하는 아랍 문화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이란의 카자르 왕조는 19세기 초 러시아와 영국에 영토와 이권을 빼앗겼다. 이에 개혁 세력과 이슬람 성직자들은 담배 불매 운동을 비롯한 이권 회수 운동을 벌이고 입헌 정치 실시를 요구하였다. 1906년에는 입헌 혁명이 일어나 의회가 구성되고 입헌 군주제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혁명은 영국과 러시아의 간섭으로 좌절되었고, 이란은 사실상 두 나라에 분할 통치되었다.
아프리카의 민족 운동
19세기 말 서구 열강은 금, 은, 고무 등의 자원을 노리고 경쟁적으로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였다. 서양 열강이 영토 분할에 맞서 아프리카에서도 국왕, 부족장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다.
19세기 중엽 이집트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철도와 전신을 설치하고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막대한 차관 때문에 이집트는 영국과 프랑스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다. 아라비 파샤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이집트인을 위한 이집트의 건설'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혁명을 일으켰으나 영국군에 진압되었다. 이후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1914).
19세기 전반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인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30여 년간 저항하였는데, 프랑스는 10만여 명의 엄청난 병력을 동원하여 저항 운동을 진압한 후 알제리를 점령하였다. 19세기말 수단은 이집트의 일부로 편입된 후 이집트와 영국의 이중 지배를 받았다. 이때 무함마드 아흐마드는 스스로를 '마흐디(구세주)'라고 부르며 외세를 배격하고 순수한 이슬람 신앙을 회복하자고 주장하였다(마흐디 운동). 마흐디의 군대는 이집트 군대를 물리쳤으나 영국군의 강한 군사력에 밀려 패배하였다.
남아프리카 나미비아 지역에서는 독일의 가혹한 수탈에 맞서 헤레로족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1904). 그러자 독일군은 헤레로족 인구의 80%를 살해하는 등 봉기를 무참하기 진압하였다. 19세기 후반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남아프리카의 동쪽의 줄루 왕국을 공격하였다(줄루 전쟁, 1879). 줄루 왕국의 병사들은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영국군을 물리쳤지만, 이어진 전투에서 기관총을 비롯한 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의 지속적인 공격에 패하여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또 탄자니아에서도 주술사들이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다(마지마지 봉기, 1905). 그러나 이들의 봉기는 독일에 의해 진압되었다.
한편, 에티오피아는 메넬리크 2세가 서양 열강의 위협 속에서 군대를 양성하고 철도를 부설하는 등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였고, 또 최신 무기를 수입하고 유럽인 교관에게 군대 훈련을 맡겨 군사력을 강화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침략에 맞서 아도와 전투(1897)에서 승리한 덕분에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민족 운동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지만,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싹튼 민족의식은 이후 조직적인 민족 운동을 전개하는 토대가 되었다.
'역사 >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 (1) | 2024.03.25 |
---|---|
[세계사]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 (2) | 2024.03.24 |
[세계사]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민족운동 (3) | 2024.03.22 |
[세계사] 일본과 조선의 근대화 운동 (1) | 2024.03.21 |
[세계사] 중국의 개항과 민족 운동 (2) (1) | 2024.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