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세계사

[세계사]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민족운동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민족운동 

 

썸네일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민족운동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민족운동

 

인도의 식민지화

     17세기 말 이래 무굴 제국은 지방 세력의 독립, 재정 파탄 등으로 혼란을 겪었다. 신항로 개척 이후 동인도 회사를 내세워 인도에 진출한 영국과 프랑스는 무굴 제국의 쇠퇴를 틈타 인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영국은 플라시 전투(1757)에서 뱅골과 연합한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무굴 제국 황제로부터 뱅골 지역의 통치권과 조세 징수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영국은 인도 전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였고 19세기 중엽에는 인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차지하였다.

     영국은 인도의 복잡한 민족 구성과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간의 종교적 갈등을 이용하여 인도를 지배하였다. 또한 인도는 영국의 원료 공급지이자 상품 시장으로 변모하였으며, 무거운 토지세를 부과하는 한편, 인도인에게 면화 재배를 강요하고 값싼 면직물을 대량으로 인도에 수출하여 인도의 수공업을 몰락시켰다. 

 

영국 식민 지배에 대한 인도인의 저항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세포이의 항쟁

     영국의 침략에 맞서 인도 남부의 마이소르 왕국, 중부의 마라타 동맹과 북부의 시크교도들이 반영 전쟁을 벌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영국의 침략과 수탈에 대한 불만은 결국 세포이의 항쟁(1857)으로 폭발하였다.

     세포이는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인도인 용병으로 영국의 인도 장악에 기여하였으나 인종 차별과 종교적 갈등 등으로 점차 불만이 쌓여 갔다. 결국 대부분이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였던 세포이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탄약 주머니에 소와 돼지의 기름이 발라져 있다는 소문이 발단이 되어 봉기하였다. 세포이의 항쟁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대규모 민족 운동으로 확대되었고, 이들은 한때 수도 델리를 점령하고 북인도까지 장악하였지만, 내부 분열과 영국의 반격으로 결국 영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세포이 항쟁은 인도 최초의 대규모 민족 운동으로서 인도인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무굴 황제를 폐위시키고, 인도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인도 통치 개선법⌟을 제정하고 뒤이어 동인도 회사를 해체하였다.

     이후 인도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는 인도 제국이 되면서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1877).

 

 

 

 

 

인도 국민 회의

     인도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영국은 인도의 사회적・종교적 분열과 복잡한 민족 구성을 이용하면서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영국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인도에서는 서양식 군대 교육을 받고 영어를 사용하는 지식인이 늘어나고, 면직물 공업을 중심으로 자본가가 성장하였다. 영국이 인도에 대한 식민 통치를 강화하자 이들을 중심으로 사회를 개혁하고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이 전개되었다.

     19세기 전반 서양의 근대 사상에 영향을 받은 힌두교 지도자들은 브라흐마 사마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종교 운동으로 출발하였으나 점차 사회 개혁 운동으로 발전하여, 인도인의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이에 영국은 효과적인 인도 지배를 위해 인도의 지식인과 자본가 등을 회유하여 전국적인 정치 조직을 만들도록 지원하였다. 그 결과 인도 뭄바이에서 영국에 협조적인 지식인, 관리, 자본가, 지주 등이 주로 참여하는 인도 국민 회의가 결성되었다(1885). 인도 국민 회의는 창립 당시 영국의 식민 통치에 순응하면서 인도인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890년대에 들어서 인도 국민 회의는 점차 반영 민족 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영국의 식민지 수탈 정책으로 인도의 국부가 유출되고 민중의 삶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인도 국민 회의 창립 대회 사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콜카타 대회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에서 최대의 거점이었던 뱅골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반영 운동의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영국이 행정상의 이유를 들어 뱅골 지역을 이슬람교도 거주 지역과 힌두교도 거주 지역으로 분할하는 뱅골 분할령을 발표하자(1905), 인도 국민 회의는 반영 운동에 앞장서기 시작하였다. 틸라크를 중심으로 한 인도 국민 회의의 급진파는 1906년 콜카타 대회를 열어 영국 상품 불매, 스와라지(인도의 자치), 스와데시(국산품 애용), 국민 교육 실시 등의 4대 강령을 채택하고 반영 운동을 전개하였다. 

     뱅골 분할령에 반대 운동이 지식인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까지 참여하면서 확대되자 영국은 전 인도 이슬람교도 연맹의 결성을 지원하여 민족 운동을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분열 정책에도 불구하고 뱅골 분할령에 대한 인도인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퍼지자, 영국은 뱅골 분할령을 철회하고(1911) 인도인에게 명목상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영국의 뱅골 분할령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동남아시아의 민족운동

     신항로 개척 이후 서구 열강은 향신료를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침략하였다. 그리고 아시아 침략의 거점과 원료 공급지를 확보하고자 점차 동남아시아 지역을 식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태국을 제외한 동남아시아 대부분 지역이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다. 열강은 동남아시아에 플랜테이션 방식을 강요하여 동남아시아가 열강의 원료 공급지로 전락하였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지배에 항거하여 근왕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조직력의 부족으로 실패하였다. 판보이쩌우는 베트남 유신회를 조직하고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키는 동유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판보이쩌우는 신해혁명의 영향을 받아 공화정을 지향하는 베트남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필리핀에서는 현지인과 화교가 중심이 되어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였다. 호세 리살은 에스파냐인과의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며 필리핀 민족 동맹을 조직하였다. 아기날도는 미국과 에스파냐가 필리핀의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자 독립을 약속한 미국을 지원하면서 필리핀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승전한 미국은 약속을 어기고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민족 운동이 시작되었다. 지식인과 이슬람교도 상인들은 민족 운동 단체인 이슬람 동맹을 결성하였다.

     태국의 짜끄리 왕조는 과감한 외교 정책을 펼쳐 동진하는 영국과 서진하는 프랑스의 완충 지대로 자리매김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