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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동아시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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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동아시아

 

제1차 세계 대전과 일본의 영향력 확대

     유럽에서는 제국주의 열강 간의 대립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일본은 영국의 동맹국으로 참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유럽 전선에 병력을 파견하지 않고 주로 동아시아에서 독일이 갖고 있던 이권을 빼앗는 데 집중하였다. 독일의 조차지였던 칭다오 일대를 점령하여 독일의 이권을 넘겨받고 적도 부근의 독일령 섬들도 점령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조차지를 중국에 반환한 대가로 중국에 ‘21개 조 요구’를 제출하였다.

• 중국 정부는 앞으로 일본국 정부가 독일 정부와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독일이 산둥성에 관하여 조약이나 기타 관계에 기초하여 중국 정부에 대해 누려 온 모든 권리와 이익을 양도 등의 처분을 하는 것에 대해 모두 승인한다.
• 양 조약국이 서로 약정하여 뤼순, 다롄의 조차 기한 및 남만주, 안펑(安奉) 철로의 기한을 모두 99년으로 연장하기로 한다.
- 『중 · 일 ‘이십일조’ 교섭 사료 전편』 -

 

     21개조 요구는 중국의 권익을 침탈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일본의 무력 위협에 굴복한 위안스카이 정부는 제5호의 고문 초빙, 경찰의 공동 관리 등 중국의 주권을 크게 침해할 일부 내용만 미룰 채 이를 받아들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려 베르사유 조약이 체졀되었다. 이 조약에서 승전국으로서 참여한 일본이 점령지인 산둥반도에 대한 권리를 독일로부터 넘겨받을 것을 인정받자, 중국 국민의 반발이 거세졌다. 중국은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21개 조 요구’는 무효라고 주장하며 산둥반도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서양 열강은 사전에 일본과 비밀 협정을 맺고,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일본이 독일로부터 빼앗은 각종 이권도 함께 인정하여 일본의 권익을 보장하였다. 한편 일본은 러시아 내전을 이용하여 시베리아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민족 자결주의와 한국의 3·1 운동

     대한 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조선 총독부를 설치한 후 헌병 경찰을 앞세운 공포 정치를 시행하였다. 이 시기 국내에서는 대한 광복회가 결성되었고, 상ㅇ하이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대동단결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들 모두는 공화주의를 내세웠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민족 자결주의가 대두하였다. 한국의 민족 운동가들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채택한 민족 자결주의에 기대를 걸고 각지에서 독립 선언을 준비하였다.

     도쿄에서는 한국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발표하였다. 한국에서는 종교계 인사들과 학생들이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3·1 운동). 3·1 운동은 중소 도시와 농촌으로 확산하여 3개월 동안 약 200여만 명이 참가하였고,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해외까지 확산하였다.

     일본은 군대와 헌병 경찰을 동원하여 만세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3·1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다양한 민족 운동으로 이어졌다. 민중도 3·1 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종 사회 운동에 참여하여 자신의 권익을 주장하게 되었다.

학생들의 투쟁 의지는 불타고 있었다. …… 거리마다 만세 함성이 물 끓듯 컸는지라. 일본 경찰은 말을 타고 3척가량이나 되는 철망치를 휘두르며, 소방부는 몽둥이를 들고 발광하듯이 우리 동포를 사상케 하였고, 거리와 마을마다 변장한 왜경이 가해를 하니 사상자가 부지기수라.
- 유병민, 「내 삼일운동의 기록」 -

 

 

 

 

중국의 5·4 운동

     신해혁명 이후 중국에서는 위안스카이가 독재 권력을 강화하면서 공화제는 형식만 남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천두슈 등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유교를 비판하고 서양 과학과 민주주의 수용을 주장하는 신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파리 강화 회의에서 독일이 갖고 있던 산둥 지방의 이권이 일본에 넘어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인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또 한국에서 일어난 3·1 운동도 중국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하였다. 이에 베이징의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 모여 ‘강화 조약 조인을 거부하라.’, ‘반드시 산둥의 이권을 회수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다(5·4 운동).

     베이징 정부의 탄압에도 시위는 전국으로 퍼졌고, 상인과 노동자 등도 가담하였다. 이에 베이징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의 조인을 거부하였다.

     5·4 운동은 학생들이 중심이 되고 민중이 참여하여 그들의 권리를 지키려고 한 움직임이었다. 또한 ‘밖으로는 국권을 쟁취하고 안으로는 국적(國賊)을 몰아내자.’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반제·반봉건의 이념을 내세운 사건이었다.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을 때 우리가 희망하고 경축한 것은 세계에 정의가 있고 인도가 있고 공리가 있다고 한 것이 아니 었겠습니까? 칭다오를 돌려주고 중국과 일본 사이의 밀약이나 군사 협정뿐 아니라 기타 불평등 조약까지 취소하는 것이 바로 공리이고 정의입니다. …… 산둥이 망하면 중국도 망합니다.
- 「베이징 학생 선언」, 1919. 5. 4. -

 

 

 

 

워싱턴 체제의 성립과 동아시아 국제 질서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로 국제 정세는 일시적인 안정을 보였다. 그러나 중국 대표단이 베르사유 조약의 조인을 거부함으로써 동아시아 문제는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하였다. 또 일본과 서양 열강이 해군력을 강화하여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을 벌였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높아졌다.

     열강들은 워싱턴 회의를 통해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열강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해군의 군비를 축소하였다. 이를 통해 형성된 새로운 국제 관계를 워싱턴 체제라고 한다. 이 회의에 따라 일본은 산둥반도의 이권을 중국에 반환하고 해군력 증강에 제한을 받았다. 중국은 주권과 독립은 보장받았지만 관세 자주권 회복, 조차지 반환, 치외 법권 철폐 등의 요구를 관철하지 못하였다.

     한편 워싱턴 체제에 대항하여 소련은 극동 인민 대표 회의를 개최하였다(1922). 당시 여러 약소민족의 지도자들은 소련의 지원을 기대하며 이 대회에 참가하였고,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에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