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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절대 왕정

절대 왕정 

 

썸네일 절대 왕정
절대 왕정

 

절대 왕정의 성립

     16세기부터 18세기에 서유럽에서는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 중앙 집권 통치가 강화된 절대 왕정이 등장하였다. 절대 왕정의 군주는 입법・사법・행정적인 권한을 모두 갖는 절대적인 지배자였다. 절대 왕정에서는 왕권을 제약해 왔던 신분제 의회가 약화하였고, 봉건 귀족은 관료제에 편입되어 국왕에게 충성하였다. 절대 왕정 아래에서도 봉건 귀족은 여전히 특권을 누렸으나, 점차 영향력이 약화하여 결국 왕에게 의존하였다.

     이처럼 절대 왕정은 봉건 국가에서 국민 국가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정치 형태이자, 약화하고 있는 봉건 귀족 세력과 성장하고 있는 시민 세력 사이의 균형 위에 성립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성립한 절대 왕정은 기본적으로 군주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군주가 큰 제약 없이 전권을 행사하는 정치 체제였다.

     절대 왕정은 귀족과 시민 계급의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왕권신수설은 절대 왕권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관료제상비군을 통해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관료제와 상비군 운영에 필요한 막대한 재정은 시민 계급의 지원으로 충당하였는데, 시민 계급은 국왕 중심의 통일 국가가 경제 활동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절대 왕정은 시민 계급의 상공업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시민 계급은 상공업과 대외 무역에서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국왕에게 협력하였다.

     절대 왕정에서는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시행하였다. 당시에는 생산 부문의 규모가 크지 않아 생산보다는 상업과 무역이 국가의 부를 늘리는 확실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각국은 금과 은 등을 국부의 원천이라 여겨 금과 은을 확보하고자 수출을 증대하고 수입을 억제하였다. 이를 위해 국내 상공업을 육성하고 보호하였으며, 완성품의 수입과 원료의 수출을 금지하고 관세 장벽을 높이며 대외 교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더 나아가 주변국의 왕위 계승 다툼에 개입하여 영토 확장을 꾀하였으며, 교역망의 확대를 배경으로 식민지 쟁탈전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절대 왕정 체제에서도 봉건적 신분제가 유지되어 귀족은 여전히 사회적 특권을 누렸으며 농민은 무거운 세금에 시달렸다.

 

 

 

서유럽의 절대 왕정

     절대 왕정은 각국의 고유한 여건 속에서 다양하게 형성되어 발전하였다. 에스파냐는 일찍이 재정복 운동을 통해 이슬람 지역을 재정복하면서 왕권 강화의 기틀을 다졌고,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삼아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펠리페 2세는 대서양 무역의 주도권을 잡고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귀금속을 바탕으로 신대륙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일부 지역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또한 무적함대를 이끈 펠리페 2세는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1571), 포르투갈을 병합하여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극단적 가톨릭 강요 정책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초래하였고, 무적함대마저 영국에 패하였다. 게다가 국내 산업이 발전하지 못하여 쇠퇴하였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해군을 육성하는 등 절대 왕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1세는 영국의 대표적인 산업인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로 진출하였다(1600). 엘리자베스 1세는 1차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오자 빈민 구제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셰익스피어 같은 유명한 작가가 등장하는 등 문화도 크게 발달하였다. 이로써 영국의 절대 왕정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프랑스의 절대 왕정은 부르봉 왕조를 개창하면서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종교 분쟁을 수습한 앙리 4세 때에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루이 14세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루이 14세는 콜베르를 등용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펼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상비군을 육성하였다. 그는 ‘태양왕’을 자처하며 귀족의 저항을 분쇄하고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 황실의 권위를 과시하고 궁정 문화를 선보임으로써, 귀족들이 더 이상 왕권에 대항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무리한 전쟁으로 재정난이 심각해졌고,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상공업에 종사하던 많은 신교도가 프랑스를 떠나면서 산업이 위축되었다.

 

 

 

동유럽의 절대 왕정

     동유럽은 17세기 중엽 이후에 절대 왕정이 성립하였다. 동유럽은 서유럽과는 달리 농노제가 존속되어 귀족들의 세력이 막강하였다. 또한 도시와 상공업의 발달이 부진하여 시민 세력도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동유럽의 절대 왕정은 서유럽보다 1세기 정도 늦게 성립하였고, 군주가 직접 개혁에 나서는 계몽 전제 정치가 나타났다.

     30년 전쟁 이후 정치적으로 분열된 독일 지역에서는 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프로이센이 강대국으로 등장하였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끝에 슐레지엔을 차지하였다. 또한 계몽사상에 심취하여 ‘국가 제일의 심부름꾼’을 자처하며 산업을 장려하고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쳤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뒤를 이은 오제프 2세가 계몽 전제 군주를 자처하며 내정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보수적인 귀족의 반발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러시아는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 시기에 후진성을 극복하고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표트르 대제는 직접 서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그들의 기술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내정 개혁과 군비 확장을 추진하였다. 그는 시베리아 경영에도 힘써 청과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스웨덴을 공략하여 발트해로 진출하는 데 성공하였고, 서유럽 문물이 수용이 쉬운 곳에 위치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삼았다. 18세기말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 전제 군주를 자처하며 내정을 개혁하는 한편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동유럽의 절대 왕정에서는 봉건 귀족이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은 군주기 귀족을 관료와 군대 지휘관으로 등용하고 그들의 특권을 보장해 주었다. 이에 따라 영주권이 강화되었고, 농노제는 그대로 유지되거나 오히려 강화되었다. 그러므로 동유럽은 서유럽보다 산업화나 근대 시민 사회로의 발전이 늦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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