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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신항로의 개척

신항로의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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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항로의 개척

 

신항로 개척의 동기

     유럽인들에게 이슬람 세계 너머에 있는 세계는 동경의 대상이자 부유한 땅이었다. 유럽인들은 아시아에는 '요한 사제'가 다스리는 크리스트교 왕국이 있으며, 동쪽 끝에는 천국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런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환상적인 믿음과 동경은 아시아로의 탐험을 자극하였다. 십자군 전쟁으로 동서 교류가 확대됨으로 인해 아시아에서 생산되어 이슬람 세계를 통해 유럽에 수입된 향신료와 비단과 같은 동방산 물품 또한 유럽인들의 아시아 항로 개척 욕구를 자극하였다.

     마르코 폴로가 13세기 후반 아시아를 여행하고 남긴 『동방견문록』은 아시아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였다. 또한 유럽인들은 아시아에서 금은과 같은 귀금속을 얻고자 하였다. 게다가 중세 말 유럽에서 전염병이 유행하자, 나쁜 공기가 질병을 옮긴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동방에서 들여온 향신료를 용기에 넣어 들고 다니면서 냄새를 맡았다. 이러한 향신료를 비롯한 동방의 산물들은 유럽인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유럽 여러 나라는 동방과 직접 무역을 하기 위해 항로를 찾아 나섰다.

     경제적 동기 이외에 종교적 열정도 신항로 개척에 일정 정도 이바지 하였다. 요한 세자의 왕국과 같은 아시아에 있는 크리스트교 세력과 동맹을 맺고 더 나아가 아시아에 크리스트교 복음을 전파하고자 한것도 신항로 개척에 중요한 동기를 제공하였다.

 

 

 

 

 

신항로 개척의 과정

     13세기 이전 유럽은 아시아로 가는 해로를 개척할 수 없었다. 당시 유럽이 가진 선박으로는 아시아로 가는 원양 항해를 할 수 없었지만, 점차 지리학・천문학・조선술이 발달하였고 그러한 발전 덕분에 원양 항해도 가능해졌다. 특히, 나침반의 사용 덕분에 유럽 선박들은 새로운 원양 항로 개척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항로 개척을 선도했던 것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였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등 이탈리아 도시들이 동지중해 무역을 주도했기 때문에 대서양 연안에 위치해 상대적으로 동지중해 무역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던 서지중해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싶은 욕구가 더욱 컸었다. 또한 이들은 이슬람에 대한 재정복 운동을 벌이며 크리스트교 확대에 대한 열망을 키웠고, 이러한 정세에서 탐험가를 지원하였다. 항해의 왕자라 불렸던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는 서아프리카 탐험을 후원했고, 그 덕분에 포르투갈은 서아프리카 항로를 먼저 개척할 수 있었다. 엔히크 왕자의 지원으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희망봉'이라고 명명한 아프리카 남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1488). 이후 바스쿠 다 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코지코드)에 도달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였다(1498).

     에스파냐의 이사벨라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는 서인도 제도에 도착하였다(1492). 콜럼버스는 자신이 도착한 땅이 인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인디언' 즉 인도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또, 포르투갈 출신의 마젤란은 대서양을 횡단하고 아메리카 대륙과 태평양을 거쳐 필리핀에 도착하였으나 원주민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행은 항해를 계속하여 인도양과 희망봉을 돌아 3년 만인 1522년에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이로써 역사상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신항로의 개척은 유럽의 세력권이 크게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를 계기로 유럽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달하여 시민 계급과 자본주의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신항로의 개척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아메리카 문명의 파괴

아메리카 여러 문명의 중심지 지도

     유럽인이 침투하기 이전 아메리카 대륙에는 독자적인 정치 체제와 문화를 가진 문명이 존재하였다. 멕시코만 연안에서는 농업 생산력 증대를 바탕으로 마야인이 5세기 전후 도시와 제국을 건설하고, 천문학을 발전시켰으며, 0과 20진법을 사용하며 번성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른 토지 부족과 기후 변화로 10세기 이후 쇠퇴하였다. 14세기 이후에는 멕시코고원 일대에 아스테카 문명이 발전하였는데,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은 30여 만 명이 거주한 계획도시였다. 아스테카인들은 그림 문자를 사용하였고, 피라미드형 신전에서 제사를 지냈다.

     한편 안데스고원 일대에는 15세기 중엽 잉카 문명이 발전하였다. 스도 쿠스코에는 거대한 태양 신전이 있었고, 금속기의 발달이 늦었으나 역법, 직물업, 건축술 등이 발전하였다. 잉카인은 새끼줄 매듭(키푸)으로 숫자와 의사를 표시하였고, 계단식 밭에 옥수수와 감자 등을 재배하였다.잉카 제국은 쿠스코를 중심으로 정복 활동을 전개하고 도로를 정비하여 전국적인 통치 체제를 갖추었다.

     번영을 누리던 아스테카 제국과 잉카 제국은 에스파냐인의 침략으로 각각 파괴되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이후 아메리카 곳곳에 유럽인들 이 몰려들었다. 에스파냐의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화포로 무장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각각 아스테카와 잉카 제국을 정복하였다.

     이후 그들은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수탈하고 원주민을 동원하여 사탕수수, 담배 등을 재배하였다. 특히 정복자들은 이윤을 높이기 위해 대농장에서 한 가지 작물만 재배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경작 방식(플랜테이션 농업)은 오늘날까지도 라틴아메리카 경제에 큰 문제점으로 남아있다.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는 북아메리카 동해안을 탐험하여 식민지를 건설하고 자국민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한편 백인들과 원주민 사이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생겨나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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