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과 종교 전쟁
종교 개혁
16세기 알프스 이북에서는 교회의 부패와 성직자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종교 개혁의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성당을 증축할 비용을 마련하고자 면벌부를 판매하자, 독일의 신학 교수인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여 교황과 교회를 비판하였다(1517). 그는 인간의 구원이 오직 신앙과 은총에 달려 있고 신앙의 근거는 『성서』라고 주장하였다.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교황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대항하였고, 마침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루터파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1555).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를 계승한 칼뱅이 종교 개혁에 나섰다. 칼뱅은 성서에 나와 있지 않은 일체의 교리와 의식을 배격하고, 인간의 구원은 신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주장하여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근면하고 성실하게 맡은 일에 종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주장은 당시 자본주의의 확산과 맞물리며 신흥 상공업자들의 환영을 받아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지로 확산되었으며, 유럽 자본주의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영국의 종교 개혁은 정치적·경제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국왕 헨리 8세는 교황이 자신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수장법을 공포하고 영국 교회를 교황의 지배에서 독립시키고,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1534). 그는 수도원을 해산하고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왕실 재산을 강화하였다. 그 뒤 엘리자베스 1세는 통일법을 반포하여 영국 국교회를 확립하였다(1559).
로마 가톨릭 교회의 대응과 종교 전쟁
16세기에 종교 개혁 운동이 퍼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로마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어(1545) 교황의 권위와 교리를 재확인하고, 교회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또한 교회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였으며, 신교 확산을 막기 위해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고 금서 목록을 작성하였다.
에스파냐의 로욜라는 예수회를 설립하여 유럽 각지에 수도원과 학교를 설립하고, 가톨릭 교리를 옹호하고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예수회는 아시아, 아프리 카, 아메리카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종교 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신교)와 가톨릭(구교)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종교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에서는 신교도들이 에스파냐의 가톨릭 강화 정책에 반발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며, 결국 독립을 달성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위그노 전쟁이 일어났으며, 낭트 칙령(1598)으 로 위그노(신교도)에게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고 제한된 지역에서의 예배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이 일어났다. 신교와 구교의 갈등에서 시작된 종교 전쟁이었으나, 유럽 주요 왕가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담하여 국제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베스트팔렌 조약(1648)이 체결되어 유럽에 종교적 평화가 찾아와 제후에게 칼뱅파를 선택할 권리가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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