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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속으로] 한니발

한니발  |  고대 전쟁에서의 혁신적 전술

     한니발(기원전 247–기원전 183 또는 181년)은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 공화정에 맞서 카르타고군을 지휘한 카르타고의 장군이자, 정치인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하나로 평가된다.

 

썸네일 - 한니발
한니발, 고대 전쟁에서의 혁신적 전술

 

성장 배경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주도적으로 활약하며 마지막까지 로마에 맞섰던 장군이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하자, 한니발의 가족은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하였고, 에스파냐의 과달키비르 강 유역을 정복한 후 ‘카르타고 노바(새로운 카르타고)’라는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한니발은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꺾은 로마공화국이 강대국으로 대두하면서 촉발된 지중해 패권 다툼의 거대한 긴장의 시대를 보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한니발이 9살에 아버지에게 '결코 로마의 친구가 되지 않겠다'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청년 시절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식민지였던 에스파냐에서 총독을 맡았다.

 

 

 

 

제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8년 여름, 28세에 불과한 젊은 장군 한니발은 에스파냐에 있는 로마의 동맹국인 사군툼(지금 스페인의 사군토)을 공격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촉발시켰다. 한니발은 10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가 예상한 해안가 쪽이 아닌 북이탈리아 방향으로 진군했다. 그는 북쪽 부족을 지나 피레네 산맥 기슭까지 이르렀고, 영리한 산악 전술과 완강한 전투를 통해 부족들을 정복했다. 피레네에서는 조국을 떠나는 것을 꺼리는 11,000명의 이베리아군을 풀어주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한니발은 4만 명의 보병과 1만 2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갈리아로 들어갔다.

     한니발은 북아프리카의 전쟁 코끼리들을 이끌고 피레네 산맥, 알프스 산맥을 넘었는데 알프스의 가혹한 날씨에 한니발의 군대는 38,000명의 보병, 8,000명의 기병, 38마리의 코끼리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입한 한니발은 티키누스전투에서 승리해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고, 이탈리아 중부 트라시메네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한다. 칸나이 전투에서 중앙에 약한 군을 배치하고 나머지 왼쪽과 오른쪽에 강한 군대를 배치하는 초승달 전법으로 대승을 거두어 로마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한니발은 상대와 자신의 장단점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 전투를 계획하는 능력으로 유명했다. 그의 탁월한 전략으로 이전에 로마와 동맹이었던 이탈리아 중부의 카푸아,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등과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그 결과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한니발의 이탈리아 퇴각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이끄는 로마는 보급을 방해하는 지구전(파비안 전략)을 벌이고,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는 군대엔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카르타고의 군대는 오직 한니발 한 사람의 지휘력에만 의존했고, 한니발 이외의 다른 장군들은 궤멸적인 패배를 거듭했던 반면 로마는 군대의 양과 질에서 카르타고를 압도했을 뿐 아니라 지도층 역시 유능했다. 로마군은 카푸아를 시작으로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를 함락하고 이탈리아 남부의 타렌툼도 자신의 편으로 돌린다.

     한니발의 형제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마고 바르카가 북 이탈리아에서 로마군에 의해 궤멸당하고 하스드루발도 목숨을 잃는다. 점점 전쟁 상황이 한니발에게 불리하게 되자 많은 도시들이 한니발에게 협력하지 않는다. 리구리아에서 그의 형제 마고의 실패와 필립 5세의 협상으로 인해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그의 위세를 회복할 마지막 희망을 잃었다. 이탈리아에서 거의 15년간의 전투로 인한 카르타고의 군사적인 힘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자마 전투

     기원전 204년 31세의 젊은 총사령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프리카를 침략하자 결국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소환되었다. 크로토나의 주노 라치니아 신전에 있는 청동 석판에 푸니아어와 그리스어로 된 원정 기록을 남긴 후 그는 아프리카로 향했다. 그의 도착은 즉시 전쟁의 우위를 회복시켰고, 그는 아프리카 군대와 이탈리아 용병 연합군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수년간 전투를 벌인 나이 든 한니발은 정신적 피로와 건강 악화로 고통받고 있었지만, 카르타고인들은 여전히 수적으로 우위를 점했고, 80마리의 전쟁 코끼리가 있었기 때문에 힘을 얻었다.

     하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 대부분의 전투와 달리 자마 전투에서는 로마 기병대가 우위를 점하여 카르타고 기병대를 신속하게 패주시키고, 나팔을 불어 카르타고 전쟁 코끼리의 효율성을 제한하는 전술에 성공했다. 전투는 치열하게 벌어졌고, 어느 시점에서 한니발은 승리의 문턱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스키피오는 그의 부하들을 집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스키피오의 기병대는 카르타고의 기병대를 격파하고 한니발의 후방을 공격했다. 이 두 공격은 카르타고의 진형을 붕괴시켰다. 한니발은 결국 자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로마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다.

     그들의 최고의 장군이 패배하자 카르타고인들은 항복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카르타고는 약 20,000명의 군대를 잃고 15,000명의 부상자를 냈다. 대조적으로 로마인의 희생자는 불과 2,500명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주요 전투는 카르타고인들에게 한니발에 대한 존경심을 잃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패배로 카르타고는 더 이상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싸울 수 없게 되었다.

 

 

 

 

도피 및 죽음

     기원전 201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났을 때, 46세였던 한니발은 곧 그가 군인뿐만 아니라 정치인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니발은 수페트(최고 치안판사) 직위에 선출되었고, 로마에 의해 부과된 만 달란트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도록 정치 및 재정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카르타고 귀족이나 로마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했고 자신에게 적이 많다는 것을 안 한니발은 자발적으로 망명, 에베소에 도착하여 안티오코스에게 환대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셀레우코스 궁정에 살면서 로마와의 전쟁에서 안티오코스 3세의 군사 고문을 맡았다. 기원전 190년,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에서 패배한 안티오코스는 한니발에게 군사 지휘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패배하여 한니발이 로마에게 넘겨지기로 되었다. 한니발은 다시 도망쳐 아르메니아 왕국, 크레타로 도피하다 비티니아 궁정에서 멈췄다.

     한나빌의 정확한 사망 연도와 사망 원인은 알려져있지 않지만, 파우사니아스는 한니발이 말에 올라탄 상태에서 뽑힌 검에 손가락에 상처를 입고 열이나 사흘 뒤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한니발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성이 로마군에 둘러싸여 탈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독극물을 복용했다고 한다. 한니발을 독살한 것은 프루시아스였다고 아피아누스는 쓰고 있다.

 

 

 

평가

     한니발은 알렉산더 대왕, 퀴로스 대왕, 율리우스 카이사르, 피루스와 함께 고대의 가장 위대한 군사 전술가이자 장군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비록 실패했지만 상대 로마인들 조차도 한니발을 극찬하며 구국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보다 대단한 장군이었다고 평가하였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한니발에게

가장 위대한 장군은 누구냐

 

고 물었고, 한니발은

알렉산더나 피루스, 그리고 나 자신

 

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니발의 전술은 그의 적이었던 로마인들이 가장 열심히 연구하고 모방했으며, 결과적으로 로마군 그리고 더 나아가 고대 지중해 세계의 전략과 전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까지도 한니발은 2,000여 년에 걸친 역사 동안 로마와 맞서 싸운 수많은 강적들 가운데 그 명성과 후대의 평가가 가장 높은 인물이며, 장군으로서의 재능 역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같은 전설적인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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