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대화재 | 64년, 로마의 비극
로마 대화재는 64년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재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화재 중 하나다. 로마를 순식간에 집어삼킨 불은 6일 만에 수그러들었다가 또 다른 화재가 발생해 3일 더 지속되어 로마의 71%가 파괴되었다.
배경
서기 1세기,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크고 많은 인구를 보유한 도시는 로마였다. 당시 로마는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대제국의 수도로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인술라'라는 다층, 다세대의 공동 주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높이 5~6층의 아파트와 비슷한 이 주택은 하부는 벽돌로 지어졌으나 상부로 갈수록 목재나 진흙 등 약한 재료를 사용하였다. 건축 기술의 한계와 날림 공사, 불법 증축으로 인하여 붕괴의 위험이 높았고, 난로나 촛불, 야간 조명을 위한 횃불과 램프 등을 가지고 건물 내부를 돌아다녔기에 언제든 화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화재가 났다 하면 불이 난 층의 위층에 사는 사람들은 대피할 방법이 없었다. 또한 제한된 토지에 많은 인구를 수용해야 했기에 주택 간의 간격이 매우 가까웠고, 길은 좁고 구불구불하여 한번 불이 나면 퍼지기 쉽고 진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로마에서의 화재는 일반적이었는데, 6년에 발생한 불로 소방관이 생겼고, 12년에 바실리카 줄리아, 14년에는 바실리카 에밀리아, 22년에는 캄푸스 마르티우스, 26년에는 서커스 막시무스, 27년 피데네 극장에서의 화재로 건물이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화재로 인한 사고는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로마 정부는 9개의 자경단을 구성하여 화재 진압 임무를 맡겼는데, 각각 14개의 구역에 경비초소를 세우고 시내를 경비했다. 그러나 기동할 수 있는 공간이 협소했고, 필요한 곳에 물을 신속하게 공급할 수 없어서 화재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불 자체를 끄기보다는 불이 일어난 곳 주변의 건물을 허물어서 불이 퍼지는 것을 막는 방식을 주로 택하는 한계가 있었다.
화재의 발생과 전개
타키투스에 따르면 화재는 64년 7월 18일에서 19일 사이의 밤에 로마의 카엘리아 언덕과 팔라틴 언덕에 인접한 서커스 지역에 있는 가연성 제품이 보관된 가게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불은 바람과 사게의 물품에 의해 건물 전체로 순식간에 번졌고, 밤에 강풍이 불어 불길은 서커스의 전체를 따라 급속히 번졌다. 화재는 좁고 구불구불한 거리와 근처에 있는 인술라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사람들은 화마에 휩쓸려 죽거나 이리저리 달아나다 밟혀 죽었다. 고대 로마의 이 아래 지역에는 화마를 방해할만한 사원과 같은 대규모 건물과 광장이 없어 화재를 끊을 수 없었다. 그 후 불은 팔라틴과 카엘리아의 경사면을 따라 넓게 퍼졌다.
주민들은 먼저 화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으로 대피하고, 그 다음 도시 외곽의 들판이나 시골길로 대피했다. 약탈자와 방화범들은 횃불을 던지거나 집단행동을 하여 불길을 확산시켜 불의 진행을 멈추거나 늦추는 조치를 방해했다고 보고되었다. 이때 몇몇 사람들이 황제의 명령이라고 주장하여 불을 끄는 것을 막거나 심지어 불을 붙이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로 인해 다들 불을 선뜻 진압하지 못했다고 한다.
로마 각지로 퍼진 화재는 6일동안 계속된 후 7월 24일에 많은 건물이 철거된 에스퀼리노 언덕의 경사면에서 멈췄다. 그러나 7월 27일 다른 화재가 발생해 3일간 더 지속되었고 수많은 공공건물이 파괴된 후 진압되었다.
타키투스는 대화재로 로마의 14개 지구 중 3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7개 지구는 그을리고 훼손된 몇 개의 폐허로 전락했으며, 단지 4개 지구만이 완전히 피해를 면했다고 설명했다. 주피터 스테이터스 신전, 베스트탈 가문, 그리고 네로의 궁전인 도무스 트랜지토리아는 손상되었거나 파괴되었다. 또한 이 화재로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이 거주하고 일하던 포럼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포럼의 중앙에 있는 광장의 쇼핑・회의 장소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스 미술 작품과 고대 문헌 등과 누마 폼필리우스가 집팔한 것으로 알려진 계시록도 소실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100만 이상의 주민 중 3분의 1만이 화재로 인한 피해를 모면했으며, 사망자 수는 수 만 명이고, 부상자와 장애를 입은 자의 수는 훨씬 많았으며, 수십 만 명이 집을 잃었다고 한다.
화재의 여파
타키투스에 따르면 네로는 화재가 났을 때 로마에서 떨어진 안티움에 있었다. 화재 소식을 들은 네로는 로마로 돌아와 이재민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정원과 공공건물을 개방하는 조치를 취하는 등 현장에 직접 나서 화재 진압을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도시의 재건을 위해 네로는 새롭고 장기적인 건축 규칙을 지시했다. 그는 건축 자재로 가연성 재료를 쓰는 것을 금지하고, 건물주는 불을 끄는데 필요한 것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는지 검사 받아야 했다. 그리고 수로에서 가져온 물이 더 많이 보급될 수 있도록 개인의 물 낭비도 금지했다. 화재로 인한 잔해는 말라리아가 만연한 근처 늪지대를 메우는 데 사용하도록 감독했다.
그러나 네로는 도시 재건 과정에서 그리스색이 지나치게 들어간 건물들을 많이 지었으며, 불에 소실된 지역의 광대한 영역에 '도무스 아우레아(황금의 집)'를 짓도록 했다. 네로의 궁전이었던 도무스 트랜지토리아를 대체하는 개인적인 주거 공간을 팔라틴, 에스퀼리노 언덕 및 셀리오 강의 일부를 포함하도록 한 것이다.
재건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네로 정부는 세금을 늘렸다. 특히 제국의 여러 주에 무거운 공물이 부과되었다. 비용의 최소한 일부를 충족시키기 위해 네로는 로마 통화 가치를 평가 절하하고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였다. 그러나 이렇게 마련된 재원을 도시 재건축에 그대로 쓰지 않고 개인의 사치에 상당 부분 사용하였다.
네로의 기독교도 탄압
네로가 불을 지르도록 지시했다는 소문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타키투스는 네로가 사람들을 몰래 보내 도시에 불을 지르게 하고 궁전의 무대에 올라 트로이의 함락을 노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서술했고, 수에토니우스는 네로가 부하들을 시켜 불을 지르게 하고 마이케나스 탑에서 화재에 휩싸인 로마를 바라봤다고 기술했다. 이러한 소문은 그가 불에 탄 지역을 신속하게 그리스식으로 재건하고, 새로운 궁전 건설지가 화재가 처음 발생한 지역과 거의 일치하면서 방화의 주범이라는 소문이 더욱 퍼지게 되었다.
네로는 자신에게 쏠리는 의심과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그 당시 로마 사회에서 신흥 종교이자, '로마 제국에 의해 처형된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공격을 받고 있었던 기독교도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잡아들였다. 네로는 기독교인을 체포하고 가능한 최악의 방법으로 고문했다. 대형 극장에서 짐승에게 던지거나 횃불처럼 산 채로 불에 태우고,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하는 등 기독교도들을 학살했다. 박해의 많은 희생자들 중에는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 중 두 명인 베드로와 바울이 있었다.
대화재 이후 다시 재건된 로마는 도로를 정비하고 화재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수로를 늘렸으며, 또한 인술라를 7층 이상 증축하지 못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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