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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속으로]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  |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적 격변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기를 지칭하는 용어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간섭이 짙던 시기에 개혁을 시도했다. 개혁파인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1968년 1월에 집권하면서 시작되었고, 소비에트 연방과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이 8월 21일에 침공하여 개혁을 중단시켰다.

 

썸네일 -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적 격변

 

     프라하의 봄 당시 둡체크는 경제와 정치적 분권화를 통한 자유 보장을 시도했고, 보도·표현·이동 자유 제한을 해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개혁을 용납하지 않고 침공하여 진압하였고, 대규모 이주와 저항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비폭력 시위로 대응하였고 군사 저항은 없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연방군을 투입하여 무력진압을 시도하며,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1989년까지 소련의 점령 상태가 지속되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둡체크를 망명시키며 당중앙위원회를 해체하였다. 침공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정상화 과정에 들어가면서 둡체크 집권 전 우세했던 가치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후임인 후사크 대통령은 둡체크의 모든 개혁을 무효로 돌렸다.

 

 

배경

     안토닌 노보트니가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집권하며 탈스탈린화를 시도했으나, 다른 동구 국가에 비해 변화 속도가 느렸다. 노보트니는 니키타 흐루쇼프를 따라 새 헌법을 선언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이란 국명을 채택했지만, 스탈린 시대 희생자의 복권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1960년 초, 체코슬로바키아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소련식 산업화 방식이 서투르게 적용되어 경제 침체가 심화되었다. 이에 대한 불만과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1965년에 노보트니가 시도한 신경제 모델은 경제 재건을 시도했지만, 이로 인해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더욱 강화되었다. 1968년, 지지를 잃은 노보트니를 제치고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제1서기가 되었다.

 

 

 

 

개방과 개혁

     체코슬로바키아 대중은 정권 내부 갈등을 알지 못하였고 변화의 전조도 나타나지 않았다. 공산당 최고 간부인 요제프 슴르코프스키는 둡체크가 공산주의 목표를 유지하고 노동 계급적 특성을 강화할 것을 강조했다.

     2월의 승리 20주년 연설에서 둡체크는 공산주의 승리 이후의 변화에 대해 설명하며 당의 주도 역할을 강화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역사의 민주주의 전통에 부합하는 공산주의를 건설할 필요성을 선언했다.

     4월에 발표된 자유화 행동 계획은 경제적 측면에서는 소비재 생산 강조하고, 다당제 체제 가능성을 열어두며, 보도와 언론의 자유 강화, 이동의 자유 증진 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계획은 비밀경찰 권력 일부 제한과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개의 동등한 나라로 연방화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행동 계획에서는 민주적인 선거 가능성을 언급하며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가 현 체제를 대체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행동 계획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스탈린 시대의 중공업, 노동력, 원자재의 의존 대신 세계의 과학-기술 혁명에 참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더 나아가 내부 계급 간의 갈등이 해소되면서 노동자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개혁은 공산당의 지도 아래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압력으로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언론의 검열 제도가 폐지되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류 매체에서 정치 논평이 처음으로 허용되었다. 경제적으로는 계획 경제와 혼합 경제를 결합하여 수출 경쟁력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둡체크는 경제 개혁을 공산당의 지도 아래에서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주도적인 언론인 루드빅 바쿨릭이 출간한 '2000개의 말'이라는 선언문은 개혁 계획을 주도할 주체로서 인민의 역할을 강조하며 체코슬로바키아 내외의 보수파와 "외국" 세력에 대한 문제를 다뤘다.

 

 

 

 

소비에트 연방의 반응

     체코슬로바키아의 변화에 대한 동구 국가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헝가리는 초기에 둡체크의 임명을 지지했지만, 다른 국가들은 이에 우려를 표하며 냉전 시대 동안 동구의 지위가 약화될까 우려했다.

     바르샤바 4국은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민주화" 발언은 다른 정책에 대한 은밀한 비판임을 시사하며 개혁 정책을 문제 삼았다. 소련은 협상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변화를 제한하려고 시도했고, 둡체크는 바르샤바 조약과 코메콘을 지킬 것을 약속하면서 개혁파를 지지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지도부는 둡체크를 지지하는 개혁파와 반개혁적인 보수파로 나뉘었고, 브레즈네프는 타협을 선택했다. 소련은 군대 철수와 함께 바르샤바 조약에 충성하고 반공산주의적 경향을 억제하겠다고 약속하는 선언을 체결했다. 이후 브라티슬라바 선언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충성하며 부르주아 이념과 반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투쟁을 선언했다. 브라티슬라바 회의 이후 소련 군대는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서 물러났지만 자국 국경에 주둔했다.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공

     체코슬로바키아 개혁에 불만을 표한 소련은 군사적 개입을 검토하게 되었고, 1968년 8월 20일에 바르샤바 조약 4개국(소련, 불가리아, 폴란드, 헝가리)이 조약군을 이끌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20만 명의 병력과 2천대의 탱크로 이뤄진 군대는 빠르게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입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포위되었다.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공으로 72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둡체크는 저항을 멈추라고 요구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저항이 발생했다.

     소련은 군사 개입의 근거로 "동구권 내 국가가 민주주의로 돌아서려는 기미가 보일 경우 소련이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언급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난 탈주자는 7만여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침공 후 총 탈주자는 30만 명에 이르렀다.

 

 

 

 

반응

     체코슬로바키아 대중은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공에 비폭력 저항으로 맞섰다. 1969년 1월 19일, 학생 얀 팔라흐는 언론 자유 억압에 반발하여 프라하에서 분신 자살하였다. 이에 따른 광범위한 저항으로 소비에트 연방은 제1서기 축출 계획을 취소했고, 둡체크는 모스크바로 이송되어 협상차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으며, 개혁 계획을 계속할 수 있었다.

     8월 25일에는 소련 시민들이 반침공 시위를 벌였고, 루마니아를 통치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소련의 정책을 비판하며 대중 연설을 했고, 소련 영향을 받던 핀란드에서도 침공은 심각한 비판거리가 되었다. 이외에도 일부 국가의 공산당도 조약군의 침공을 비판하였다.

     서방 국가들은 침공 사건을 입으로만 비판하였다. 침공 당일 밤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소집을 요구했는데,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가 침공을 비판하고, 소련 대사는 바르샤바 조약의 행동을 "반사회적 세력"에 대항한 "형제애적 원조"로 주장했다. 다음 날 몇몇 나라들은 침공을 비판하고 침공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안했고, 투표 결과 10개 회원국이 찬성하고, 알제리, 인도, 파키스탄은 기권하며, 소비에트 연방과 헝가리는 반대했다. 캐나다 대표는 유엔 대표단이 프라하로 가서 투옥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자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자는 제안을 즉각 내놓았다. 그러나 8월 26일에 이 제안의 투표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신임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는 이 모든 문제를 안보이사회 의제에서 제외하도록 요청했다.

 

 

 

이후

     1969년 2월, 알렉산데르 둡체크는 제1서기에서 물러나고 구스타프 후사크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로써 "정상화" 시기가 시작되었다. 둡체크는 공산당에서 제명되고 산림 공무원으로 좌천되었다. 후사크는 둡체크의 개혁을 철회하고, 개혁적인 당원들을 처벌하며, 정치적 변화에 반대한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을 공직에서 내쫓았다. 그는 경찰 당국의 권한을 회복하고 중앙 집중화를 강화했으며,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정치에 대한 발언을 금지했다. 1969년에는 개혁 정책 가운데 유일하게 존치한 체코슬로바키아가 연방화되어 두 개의 공화국으로 나뉘었다.

     1987년,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개혁 정책이 둡체크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자 둡체크는 연방 의회 의장이 되었고, 1992년 6월까지 이 임무를 수행하며 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