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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속으로] 바르바리 전쟁

바르바리 전쟁  |  바다의 도전

     바르바리 국가의 해적들이 미국과 유럽 선박을 습격하는 행위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적인 조치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연합과 바르바리 해적들 간에 발생한 해상 전쟁을 바르바리 전쟁이라고 한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

     제1차 바르바리 전쟁(The First Barbary War, 1801년 ~ 1805년) 또는 트리폴리 전쟁이나 바르바리 해안 전쟁은 미국과 바르바리 국가로 알려진 북서 아프리카 이슬람 국가들과의 전쟁이다.

배경

     유럽인들은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트리폴리, 튀니스, 알제리 세 나라를 바르바리 국가로 지칭했다. 이들 나라는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실제로는 독립적인 자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국가들은 지중해 통과 선박에 대한 통행료를 걷거나, 해적 행위를 통해 몸값을 받는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강력한 해군을 보유해 통행료를 걷지 않았지만, 해적 행위를 후원하여 다른 국가의 선박을 습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은 독립 이전부터 해운업이 발달해 있었고, 바르바리 해적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영국 상선 깃발을 사용했다.

     1784년, 모로코의 해적들이 스페인 선박을 나포하면서 미국은 바르바리 국가들과의 협상에 참여해 모로코와의 조약으로 일부 억류 선원이 석방되었지만, 알제리와의 협상은 성공하지 못했다. 미국은 1798년 해군 창설로 바르바리 해적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알제리가 미국 선원을 석방하려고 1795년에 100만 달러로 협상을 진행했지만, 이는 미국인들의 분노를 증폭시켰고, 결국 해군 강화와 함께 공물 지불 중단으로 이어졌다.

 

선전포고

     1801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취임 직전에 의회는 해군 법안을 통과시켜 6척의 프리깃을 건조하게 했다. 제퍼슨은 바르바리 해적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 상선을 보호하는 해군을 구축하기로 했다. 그러나 트리폴리 파샤는 22만 5천 달러를 요구하며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제퍼슨은 이를 거부하고, 미국 해군을 파견하여 트리폴리에 대한 대응을 높였다. 이로써 미국은 바르바리 해적에 맞서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했다. 스웨덴의 플로틸라와 함께 미국은 트리폴리에 대한 해상 봉쇄를 시행하며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오스만 제국의 도움을 받아 이스탄불에서 트리폴리로 향하는 함대는 국기를 내걸고 입항했지만, 트리폴리의 반응은 위협적이었다. 이로써 미국은 바르바리 해적에 대항하기 위한 함대를 지중해로 파견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결국 1805년 바르바리 국가들과의 조약을 통해 일시적인 해결이 이뤄졌다.

 

 

 

 

제2차 바르바리 전쟁(1815년)

     제2차 바르바리 전쟁은 1815년에 미국과 알제리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19세기 초에 발생한 바르바리 국가와의 두 번째 전쟁이다. 1차 바르바리 전쟁 이후 미국이 승리하고 양측 간에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미영전쟁으로 인해 미국 선박에 대한 약탈이 재발하자 미국은 알제리 등 바르바리 국가들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미국은 알제리를 1815년에 공격하고 협상을 통해 평화조약을 체결하며, 공납 폐지와 몸값 없이 포로를 석방하고 배상금을 받았다. 이와 함께 튀니스와 트리폴리에도 기항하여 성공적인 협상을 이루어내었다. 이러한 과감한 포함외교는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에 성공했다.

 

배경

바르바리 국가

     1659년 알제리에서는 반란이 발생하여 오스만 제국이 파견한 파샤(총독)가 권력을 잃고 알제리 군인 집단의 지도자인 '데이'가 힘을 차지했다. 데이는 세습되지 않았으며, 권력 쟁탈전에서 승리한 군인이 세력을 확립했다. 반면에 튀니스와 트리폴리는 권력을 장악한 군인들에 의해 후세인 왕조와 카라만리 왕조가 세워졌다. 권력은 '베이'라 불리는 지위의 자에 의해 행사되었으며, 후세인과 카라만리 가문에서는 이 지위를 세습했다.

 

미국과 유럽의 상황

     제1차 바르바리 전쟁 이후, 미국은 북아프리카 국가들의 해적 활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대불동맹 전쟁(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하여 미국의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이로 인해 미영 전쟁(1812년 - 1814년)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북아프리카에 대한 주의를 쏟지 못했다. 바르바리 국가의 해적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과 유럽의 선박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고, 선원과 상선을 억류하여 몸값을 요구하는 해적 행위를 다시 시작했다. 특히 미영 전쟁 동안 영국은 알제리의 알리 데이에게 미국 상선에 대한 약탈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는 유럽 열강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휘말려 있었으며, 이 전쟁이 완전히 종료된 것은 나폴레옹의 백일천하가 1815년 6월에 끝난 이후였다.

 

 

 

 

미국의 대응

     1814년 12월에 미국과 영국은 헨트조약을 맺어 전쟁을 종결했으나, 실제적인 종전은 1815년 2월에 이루어졌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다시 북아프리카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고, 3월 3일에 의회는 알제리에 대한 해군 파견을 승인했다. 전쟁 준비를 위해 2개의 전대가 편성되었고, 이 가운데 스티븐 디케이터 대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5월 20일에 출항했다. 디케이터의 전대는 〈USS 게리에르〉, 〈USS 컨스텔레이션〉, 〈HMS 마케도니아〉, 그리고 다른 함선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베인브리지의 전대는 준비가 늦어져 7월 1일에 출항했다.

 

협상

     1815년 7월 3일, 미국의 디케이터 전대는 알제리 항구에 도착하여 알제리의 기함인 〈메슈다〉와 〈에스테디오〉를 나포하였다. 이에 알제리 파샤 데이와의 협상에서 미국은 도시 파괴 위협과 손해보상을 포함한 조건을 제시했고, 알제리는 이를 수용했다. 협상 결과로 10명으로 추산되는 미국인 포로가 석방되고, 미국은 메슈다와 에스테디오를 반환했다. 또한, 유럽인 포로 중 일부는 1만 달러를 지불하고 파샤의 국민 500여명과 교환되었다. 이 협약은 향후 통행세 면제와 완전한 미국의 항해권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결과

     이러한 전쟁들은 미국이 국제 무역 및 해상 안전을 위해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바르바리 국가들과의 전쟁은 미국이 유럽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해상국가로서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에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