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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국가기념일] 6.10민주항쟁 기념일

6・10민주항쟁 기념일

   6・10민주항쟁 기념일은 특정 계층이나 집단에 국한하지 않고 각계각층의 국민이 참여하여 우리나라 민주주의 도약의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인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하고 민주주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입니다. 

 

썸네일 - 610 민주항쟁 기념일
6.10민주항쟁 기념일

 

6・10민주항쟁 기념일 제정

     6월 민주항쟁은 1987년 '4・13호헌조치' 발표 후, 그해 6월 10일을 정점으로 20여 일 동안 전국적으로 확산된 반독재 민주화운동입니다. 6・10 국민대회가 전개된 1987년 6월 10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2007년 5월 2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습니다.  

 

 

6월항쟁 타임라인

     

 1987. 01. 14.

 

박종철군 고문으로 사망 - 서울대생 박종철 군,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

 

 

 1987. 02. 07. 

 

박종철군 범국민 추도식 -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에 대한 경찰의 원천봉쇄로 전국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 경찰 799명 연행

 

 

 1987. 03. 03. 

 

박종철군 49제와 고문추방 국민 대행진 - 경찰의 원천봉쇄로 저지되자,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거리시위, 439명 연행 

 

 

 1987. 04. 13. 

 

전두환 4・13 호헌 조치 -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 성명, '현행헌법으로 정부이양', '대통령 선거 연내 실시' 발표

 

 

 1987. 04. 21. ~ 

 

호헌반대운동 - 호헌반대운동은 종교계와 전문직을 필두로 하여 각계각층으로 퍼져나갔다. 천주교계에서는 각 교구별로 사제가 중심이 되어 단식농성에 들어갔으며, ‘호헌철폐와 민주제 개헌 지지’를 주장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1987. 05. 20.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 사건 진상조작 폭로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축소・조작되었으며, 전범이 따로 있다'는 내용의 성명 발표

 

 

 1987. 05. 23.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 결성 - 재야인사 등 134명, 기독교회관에서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 결성하고, 6월 10일 규탄대회 갖기로 결정

 

 

 1987. 05. 27.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발족 - 민주당・종교계・재야단체 등 발기인 2191명,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발대식 거행하고 4・13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

 

 

 1987. 06. 09. 

 

이한열 열사 최루탄에 피격 - 연세대생 이한열 군, 학교 앞 시위 중 최루탄에 부상

 

 

 1987. 06. 10.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개최 -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18개 도시 가두시위 형태로 전개

 

 

 

6•10 대회 결의문(1987.6.10.)

-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

 

 첫째, 이 땅에서 권력에 의한 고문, 테러, 불법 연행, 불법 연금 등 여하한 인권 유린도 영원히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국민적 요구이다.

 

셋째, 정치 군부 세력의 몇몇 핵심자들끼리 독재 권력을 무슨 사유물인 것처럼 주고받으려는 음모에서 비롯된 이른바 4.13 호헌 성명이 무효임을 선언하며, •••••• 범국민적 운동을 더 한층 가열할 것임을 결의한다.

 

 

 

 1987. 06. 10. 

 

명동성당 농성(1987. 6. 10. - 15.) - 을지로와 명동 입구 일대의 시위대가 경찰의 진압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농성. 안기부와 경찰의 최고위급 간부들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와 압박을 가하고 프락치를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했으나, 천주교계와 농성자들은 굳건히 맞섰다. 6월 14일 정부는 다음 날까지 해산하는 것을 조건으로 농성자에 대한 사법적 처벌을 유예할 것임을 통보했다. 6월 15일 농성자들은 2차례에 걸친 투표를 통해 농성을 풀 것을 결정했다. 이들은 ‘명동투쟁 민주시민, 학생일동’ 명의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2만여 명의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농성을 해제했다.

 

 

 1987. 06. 12. 

 

회사원・시민 등 1000여 명이 '호헌처례'를 외치며 시위

 

 

 1987. 06. 20. 

 

불교계 '민주화를 위한 구국법회' 진행

 

 

1987. 06. 20. 

 

 불교계 '민주화를 위한 구국법회' 진행

 

 

 1987. 06. 21. 

 

기독교대한감리회 '민주화를 위한 구국기도회' 

 

 

 1987. 06. 23. 

 

호헌철폐와 독재종식을 위한 서울지역 청년학도 결의대회 - 서울지역 25개 대학생 2만여 명,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주최로 `호헌철폐와 독재종식을 위한 서울지역 청년학도 결의대회`를 갖고 6·26 국민평화대행진 적극 참여 결의. 

 

 

 1987. 06. 26.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

 

 

 1987. 06. 29. 

 

 노태우 민정당대표위원, 6·29 선언 - 노태우 민정당대표위원,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 8개항의 시국수습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6·29 선언)

 

 

 1987. 06. 20. 

 

 전두환,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담화' - 대통령,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6·29선언 8개 항을 모두 수용 

 

 

 1987. 07. 09. 

 

 고 이한열 열사 영결식 - 고 이한열 열사 영결식, 시민·학생 1백만여 명, 서울 시청 앞 운집,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

 

 

 1987. 07. 15. 

 

87노동자 대투쟁((7월~9월)

 

 

 1987. 07. 21.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창립

 

 

 1987. 10. 27. 

 

대통령중심 직선제에 관한 새 헌법안, 국민투표로 확정. 찬성 93.1% 

 

 

 1987. 12. 26. 

 

16년 만에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 제13대 대통령선거 실시, 노태우 후보 당선 - 공정선거 감시단 소속 대학생 등 100여 명, 부재자투표함 밀반출을 적발하여 구로구청사 봉쇄하고 농성(구로구청농성 사건) 

 

 

 

6월 항쟁의 의의

     6월 항쟁은 사실상 수십 년에 걸친 권위주의 통치국민의 힘으로 청산시킨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국민의 직선제 개헌안 목소리를 무시하고 간선제 유지로 정권을 연장하려고 했던 전두환 정부를 사실상 굴복시켰으며 민주화를 달성한 분기점으로 평가됩니다.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제6공화국'은 '1987년 체제'라고도 불리며, 이는 대한민국의 헌정사상 대한민국 제1공화국 이래 가장 길게 장수하고 있는 헌법 체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1987년의 민주화는 국민들의 정치적 열망으로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데도 의의가 있습니다. 

 

 

참고

- 6・10민주항쟁

- 행정안전부

 

 

 

[한국사] 6월 민주 항쟁

6월 민주 항쟁 "오늘은 기쁜 날, 찻값은 무료입니다. 가화 다방 주인백." 6・29 민주화 선언이 발표되던 날, 서울 곳곳의 찻집과 음식점들은 무료로 손님을 맞았다. 그날 오후부터 밤까지 가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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