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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제국주의의 등장과 식민지 분할

제국주의의 등장과 식민지 분할 

 

썸네일 제국주의의 등장과 식민지 분할
제국주의의 등장과 식민지 분할

 

제국주의의 등장

     산업 혁명 이후 유럽에서는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하였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소수의 거대 기업이 대다수의 중소 자본가를 흡수하여 시장을 지배하는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도달한 서양 열강은 중화학 공업에서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는 등 자본주의 경제가 고도로 발전하자 값싼 원료 공급지와 제품을 판매하고 국내 잉여 자본을 투자할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였다. 이에 서양 열강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제국주의라고 하다. 

 

 

 

 

제국주의의 발전

     제국주의 열강의 대외 팽창은 경제적 이득 추구뿐만 아니라 국민 국가 간 경쟁과 갈등 속에서도 추진되었다. 유럽 각국은 다른 나라와 경쟁하려면 식민지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였다. 열강은 식민지가 많을수록 자국의 위신이 높아진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국내의 사회 갈등이 심해지자 국민의 관심을 타국과의 식민지 경쟁에서 승리하는 일로 돌려 사회 통합을 도모하였다. 

    제국주의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퍼진 민족주의와 사회 진화론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였다. 극단적 형태로 변질된 강대국의 침략적 민족주의는 식민지를 확대하여 대제국을 형성하려는 민족 감정을 고조시켰다.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여 "우수한 인종만이 생존하고 열등한 인종은 도태된다."라고 주장하는 사회 진화론과 인종주의가 퍼졌다. 사회 진화론은 백인의 인종적 우월감과 식민지 문명화의 명분을 내세우며, 그곳에 크리스트교와 유럽 문명을 전파하는 것을 백인의 신성한 의무이자 봉사라고 미화하며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서양 열강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여기에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새로운 나라가 참여하여 경쟁이 심화되었다. 또 배타적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국제적인 대립으로 확대되었다. 제국주의적 침략은 정책은 아시아, 아프리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아시아・태평양 분할

     포르투갈은 신항로 개척 이후 가장 먼저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였고, 에스파냐는 필리핀을 점령하여 식민지 경영에 주력하였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자카르타를 거점으로 향신료 무역을 시작하였으며 자와, 수마트라, 보르네오를 합쳐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건설하였다(1904). 이어 대규모 농장을 조성하고 고무, 사탕수수, 커피 등을 강제로 재배하는 플랜테이션을 통해 원주민을 착취하였다.

     영국은 17세기 초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인도에 진출하였고, 인도에 진출한 프랑스를 플라시 전투(1757)에서 몰아내고 뱅골 지역의 통치권을 차지하여 인도를 간접지배하였다. 이후 영국은 꾸준히 세력을 확대하여 19세기 중엽에는 인도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영국인 인도인에게 목화 재배를 강요하였고 영국의 값싼 면직물은 인도에 대량으로 들여왔다. 이로 인해 인도의 면 공업은 파괴되었고, 수공업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이후 전쟁을 통해 미얀마를 식민지화하여 인도에 병합하였다. 나아가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 북부를 차지하여 말레이 연방을 수립하였고(1895), 네팔과 아프가니스탄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종주권을 주장하던 청을 물리치고 베트남을 차지하였다. 이후 캄보디아, 라오스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조직하였다(1887). 프랑스는 베트남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대규모로 쌀농사를 지어 많은 이윤을 남겼다.

     한편 제국주의 열강의 영토 분할은 태평양 섬 지역에서도 이루어졌다.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자치령으로 만들었고, 독일도 비스마르크 제도와 마셜 제도 등을 점령하였다. 또한 미국은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고(1898), 하와이와 괌을 차지하였다. 

 

프랑스의 인도 차이나 착취 사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신항로 개척 이후 서구 열강은 아프리카 해안 지대에 진출하여 노예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19세기에 들어 리빙스턴과 스탠리 등 탐험가들의 활동으로 아프리카의 엄청난 지하자원과 시장 잠재력이 알려지자 서양 열강은 앞다투어 아프리카를 침략하였다. 그 결과 20세기 초에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전 지역을 분할・점령하였다.  

     아프리카 분할을 주도한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영국은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삼고 수에즈 운하를 차지하였으며, 카이로에서 아프리카 최남단의 케이프타운을 잇는 아프리카 종단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맞서 프랑스는 알제리, 모로코 등을 기점으로 동쪽의 마다가스카르에 진출하는 아프리카 횡단 정책을 추진하여 영국과 대립하였다. 결국 1898년 영국과 프랑스는 파쇼다 사건으로 충돌하였다. 마지막 순간에 서로 양보하여 전쟁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그 밖에 벨기에는 중앙아프리카의 콩고를 식민지로 삼았고, 아프리카 분할에 뒤늦게 뛰어든 독일은 카메룬과 토고를 차지하였으며, 동아프리카에 진출하였다. 독일과 프랑스는 모로코를 둘러싸고 두 차례 대립하였으나(모로코 사건), 영국이 프랑스를 지지하여 독일이 퇴각하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 지배 방식은 서로 달랐다. 영국은 토착민 협력자에게 통치를 위임하는 간접 지배를 선호하였지만, 프랑스는 공화주의 전통을 식민지에 이식하여 토착민을 프랑스 시민으로 만드는 동화 정책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원주민을 동원하여 사탕수수, 목화, 코코아 등의 농장을 경영하고, 금과 다이아몬드 등 귀금속을 얻기 위해 광산을 개발하면서 아프리카인을 잔혹하게 수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