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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전후 아시아의 민족 운동

전후 아시아의 민족 운동 

 

썸네일 전후 아시아의 민족운동
전후 아시아의 민족 운동

 

중국의 민족 운동

신문화 운동과 5・4 운동

     신해혁명 이후 천두슈 등 지식인과 학생들이 신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신문화 운동을 통해 봉건적인 유교 사상을 비판하고 서양의 과학과 민주주의 사상을 수용하여 중국 사회의 변화를 도모하려 하였다. 또한 잡지 『신청년』을 간행하고, 대중이 문학과 새로운 지식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구어체로 글을 쓰는 백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일본은 독일 세력권이던 산둥반도의 칭다오를 점령하고, 위안스카이 정부에 일본의 권익을 보장받으려는 ‘21개 조 요구’를 강요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개최된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이러한 ‘ 21개 조 요구’의 취소와 산둥 반도의 반환을 요구한 중국의 입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국의 3・1 운동 등에 영향을 받은 베이징의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격렬한 항위 시위를 일으켰다. 상인과 노동자가 가세하면서 시위는 대규모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5・4 운동, 1919). 이들은 군벌 타도, 친일파 타도 등을 외쳤다. 결국 베이징의 군벌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의 조인을 거부하였으며, 이후 열강은 중국의 영토 보전을 약속하였다.

 

 

 

 

제1, 2차 국공 합작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와 러시아 혁명은 중국의 민족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5・4 운동에 자극을 받아 쑨원 등은 중국 국민당을 천두슈 등은 중국 공산당을 결성하였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공동으로 군벌을 소탕하고, 군벌과 연결된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기 위한 국민 혁명에 나섰다(제1차 국공 합작, 1924).

     쑨원 사후 실권을 장악한 장제스는 북쪽의 군벌 정부를 타도하는 북벌을 단행하여 베이징을 점령한 뒤 국민 혁명을 완성하고 난징에 통일된 국민당 정부를 수립하였다(1928). 이 과정에서 장제스가 중국 공산당을 배척하자 제1차 국공 합작은 붕괴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홍군은 국민당의 지배에 저항하면서 토지 혁명을 통해 농촌에 근거지를 건설하였다. 만주 사변(1931) 이후에도 장제스가 공산당 소탕에 전력을 기울이자 결국 궁지에 몰린 홍군은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대장정(1934~1936)에 나서게 되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이 확대되는 가운데 내전을 중지하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치단결하여 항일 투쟁에 나서라는 요구가 점점 강해지면서 시안 사건이 일어났다. 뒤이어 중일 전쟁(1937)이 발발하자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과 다시 통일 전선을 형성하고(제2차 국공 합작, 1937) 항일 투쟁에 나섰다. 항일 전쟁 기간 중 중국 공산당은 농민을 동원하는 데 성공하여 종전 이후 국민당에 대항할 수 있는 실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인도의 민족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인도는 자치권을 주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영국에 협조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롤럿법을 제정하여 식민 지배를 강화하고 인도의 민족 운동을 억압하였다. 이에 맞서 간디가 이끄는 인도 국민 회의는 비폭력・불복종을 내세우며 영국 상품 불매, 공직거부, 납세 거부 등의 활동을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간디가 주도한 소금 행진은 전 인도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1930).

     한편, 간디의 투쟁 방식을 소극적이라고 비판한 사람들 중 일부는 네루를 중심으로 인도 독립 동맹을 결성하였다(1928). 그는 간디의 지원 아래 인도 국민 회의를 이끌며 인도의 완전한 독립을 민족 운동의 목표로 결의하였고 불복종 운동을 이어 나갔다. 이들은 무력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영국과 빈번히 충돌하였다. 결국 영국은 신인도 통치법을 제정하여 제한된 범위에서 인도 각 주의 자치권을 인정하였으나(1935), 군사권과 외교권은 여전히 영국의 인도 총독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인도인들은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전후 아시아 아프리카 각국의 민족 운동
출처 - 금성출판사 고등학교 세계사

 

 

 

 

서아시아의 민족 운동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하였다가 패전국이 되었다. 이에 청년 튀르크당의 당원이었던 무스타파 케말이 청년 강교들과 함께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고 터키 공화국을 선포하였다(1923). 대통령이 취임한 무스타파 케말은 이슬람교의 영향력을 축소하면서 세속화와 서구화를 추진하였다. 그는 일부다처제를 폐지하였으며 로마자 표기법을 도입하는 등 근대화에 전력을 기울였다.

     터키 공화국의 출범에 자극을 받은 이란인은 리자 샤의 지도로 카자르 왕조 대신 팔레비 왕조를 세웠다(1925). 리자 샤는 공식 국호를 이란으로 전항 후 산업 발전에 힘쓰고 신식 교육을 시행하는 등 근대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영국과 소련이 다시 이란을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종전 후에는 미국의 영향력이 강해져 이란의 자립은 여전히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