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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속으로] 흑사병

흑사병  |  유럽을 휩쓴 죽음의 그림자

     14세기 유럽에서 창궐한 흑사병은 최악의 세계적 유행병으로 약 7,500만~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흑사병의 병원균은 2010년~2011년 남유럽인들을 대상으로 한 DNA 분석에서 페스트균으로 확인되었다.

 

썸네일 - 흑사병
흑사병, 유럽을 휩쓴 죽음의 그림자

 

     흑사병은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어 비단길을 따라 서쪽으로 확산해 1343년경 크림반도에 닿았다. 그곳에서 부터 화물선에 들끓던 검은 쥐에 기생하는 동양쥐벼룩을 중간 숙주로 하여 지중해 해운망을 따라 유럽 전역에 퍼졌으며, 이로 인해 유럽 총인구의 30~60%가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14세기 세계 인구는 약 1억 명 감소했으며, 17세기가 되어서야 이전 수준까지 회복될 수 있었다.

14세기 페스트 유행은 유럽사의 종교, 사회, 경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개요

     1347년 처음 창궐한 흑사병은 이후 수차례 발생하며 약 2천5백만 명의 희생자를 낸 대유행병으로, 초기에는 중국에서 시작하여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당시 유럽의 인구 중 30%에 해당하는 인구가 목숨을 잃었으며, 1700년대까지 100여 차례에 걸쳐 전염병이 발생했다.

     14세기 유럽에 퍼진 흑사병은 “대흑사병"으로 불리며 유럽 사회의 구조를 붕괴시킬 정도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흑사병이 원인의 무지함 속에서 거지, 유대인, 한센병 환자, 외국인 등이 흑사병을 전파하는 자로 몰려 흉악한 집단폭력과 학살을 당하였다. 이러한 학살은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소수자에게 전가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한편, 흑사병의 창궐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신조를 일으키며 삶에 대한 태도 변화를 가져왔고, 종교적 사고에도 영향을 미쳐 하나님이 흑사병으로 심판하니 고행을 통해 죄를 씻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1883년에 붙여진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피부가 검게 변색하는 증상에 따라 붙여진 것이며, 증상이 진행되면 검게 변색된 부위에 괴저가 생겨 죽음에 이르게 된다. 흑사병은 세균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에 의해 전염되며, 이 세균을 가진 감염된 쥐의 혈액을 먹은 벼룩이 사람의 피를 빨면서 전염된다. 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20세기 이후에 제기되었는데, 쥐와 사람이 함께 걸리는 전염병이지만 장거리 여행은 쥐가 아닌 사람이 한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역사

흑사병의 전염경로

     흑사병이 유럽에 전파된 경로에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몽골 제국과 비단길이 관련된 사실은 분명하다. 몽골 제국은 비단길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점령하였으며, 1347년에 몽골의 포위 공격이 있었던 크림반도의 페오도시야에서 흑사병이 처음으로 창궐했다. 킵차크 칸국의 자니베크 칸은 흑사병에 걸린 군인의 시체를 투석기로 도시의 성벽 너머로 던져 흑사병을 생물학 무기로 사용했다는 것인데, 이는 확인되지 않은 이론이며,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설이 확산된 이유 중 하나는 유럽인들이 흑사병의 원인을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찾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흑사병은 이후 페오도시야의 교역소 사람들 중 일부에서 시작해 전 유럽으로 퍼져갔다. 또한 14세기 초 유럽은 중세온난기 종료와 함께 기후 변화로 겨울 추위가 심해지고 여름 기후가 악화했다. 1315년에서 1317년 사이에 대 기근이 발생하며, 이로 인해 흑사병의 피해가 더욱 악화되었다.

 

아시아

     흑사병의 전파는 몽골의 영향 외에도 전쟁, 기아, 기후 변화 등 여러 원인에 기인했다. 13세기 몽골의 중국 점령 시기에 공업과 상업이 붕괴되고 기아가 만연해져 중국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 14세기에는 중국에서도 흑사병이 번졌으며, 중국의 인구 중 약 30%가 이로 인해 사망했다.

     흑사병이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가설은 중국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유럽의 흑사병이 한창이던 기간 동안 허베이를 비롯한 중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흑사병이 확산되었다. 이 시기 중국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시대였는데, 몽골과 비단길을 오가던 상인들에 의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1347년에 처음 발생한 유럽의 흑사병이 이런 관련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유럽

     1347년, 상선 함대가 시칠리아의 메시나항에 도착했을 때 선원들이 이상한 전염병에 감염되어 모두 사망하는 사건이 유럽에 흑사병이 전파된 시작이었다. 이후 1347년에서 1348년 사이에 흑사병은 이탈리아의 제노바와 베니스에서 발생하여 전역으로 번져, 1348년에는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잉글랜드 등에서 발병했다. 1349년에서 1350년 사이에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반도까지 흑사병이 확산되었고, 노르웨이에서는 1349년에 아스퀴 항에 도착한 선박에서 최초의 발병이 시작되어 베르겐까지 번져갔다. 1351년에는 러시아에서도 흑사병이 확산되었으며, 폴란드를 제외한 유럽 전역에서 흑사병이 창궐했지만 벨기에 등 일부 지역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서아시아

     흑사병은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발생하여 상당한 인구 감소와 사회 변화를 초래했다. 중동 지역에서의 전파는 러시아 남부 흑해 연안에서 시작되었고, 1347년 가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발병한 흑사병이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확산되었다. 이후 흑해 연안 항구 도시들을 중심으로 창궐하며 1348년에는 가자, 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 번졌다. 1348년부터 1349년까지 흑사병은 염료 무역의 중심이던 안티오키아까지 퍼져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흑사병에 영향을 받았다.

     1349년에는 메카와 모술에서도 흑사병이 발생하였고, 이집트를 방문한 예멘 국왕 일행이 흑사병에 걸려 돌아오면서 예멘에서도 전염이 일어났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 따르면, 1348년 4월에는 다마스쿠스에서 하루에 2천 명이 사망하고, 카이로와 이집트 전역에서는 동시기에 2만 4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했다.

 

계속되는 재발

     14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과 지중해 연안에서 흑사병이 계속해서 창궐하며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영국에서는 14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여러 차례의 흑사병 발병으로 적게는 4백만 명에서 많게는 7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인구가 희생되었다. 이중 널리 알려진 전염 사례로는 런던 대흑사병(1665년–1666년), 베니스 대흑사병(1679년), 이탈리아 흑사병 (1629년-1631년) 등이 있다. 흑사병 재발의 이유 중 하나로는 30년 전쟁 당시 군대의 빈번한 이동이 지목되기도 한다. 1738년 대흑사병은 튀니지의 상선을 통해 전파되어 아드리아해와 우크라이나로 번졌으며, 이로 인해 루마니아의 티미쇼아라는 지역이 큰 타격을 입었다.

     1940년에는 중국 북동부 눙안 현과 장춘에서 흑사병이 발생하여 731 부대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2017년에는 마다가스카르에서 페스트가 발병하여 2017년 10월 13일 기준 561명이 감염되었고 50명이 사망했다.

 

 

 

 

 

 

 

감염의 원인과 증상

페스트균의 발견

     1894년, 프랑스 세균학자 알렉상드르 예르생과 일본의 세균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기타자토 시바사부로가 동시에 발견했다. 기타자토 시바사부로가 며칠 더 빨리 발견했지만, 예르생은 이 병원균이 사람뿐만 아니라 설치류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혀내어 해당 병의 전파 원인이 똥임을 알게 되었다.

 

서혜임파선종 흑사병 이론

     흑사병의 원인균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는 주로 토양에서 서식하며 때때로 설치류와 인간의 체내에 침입하여 전파되어 흑사병을 유발한다. 미셀 드란코르가 제시한 발생 모델에 따르면 야생화된 개는 벼룩을 통해 감염되거나 감염된 시체를 먹음으로써 흑사병에 걸렸다.

     유럽에서 흑사병의 출현, 전파, 소멸에 관한 역학적 가설 중 특히 흥미로운 것은 다른 종의 설치류라 하더라도 벼룩을 통해 원인균이 전파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온 곰쥐뿐만 아니라 원래 유럽에 서식하던 시궁쥐에 의해서도 흑사병이 전파될 수 있었다. 특히 시궁쥐는 다른 설치류와는 달리 인간 거주지에서 서식하는 특성으로 인해 흑사병 전파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흑사병의 확산과 소강, 그리고 재확산 및 갑작스러운 소멸은 설치류와 인간의 집단 면역 형성이 지목되고 있다.

 

 

 

 

 

흑사병 창궐의 결과

인구감소

  • 유럽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지역에 따라 1/3에서 1/2 정도로 추정되며, 총 희생자는 7천5백만 명에서 2억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흑사병은 초기 4년 동안에 유럽 전체의 45% ~ 50%에 해당하는 사망률을 보였으며, 이 지역마다 다양한 수준의 희생자를 나타냈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남부 등에서는 지역마다 80%의 인구가 희생되는 경우가 흔했지만, 북부 독일, 잉글랜드 등에서는 20% 정도의 사망률이었다.

이 대유행은 혈액형 분포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우세하다. 유럽 백인의 80% 이상이 혈액형 O형과 A형인데, 이는 혈액형 B형과 AB형은 흑사병에 더 취약했고, 이로 인해 유럽인의 혈액형 구성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 아시아

1334년에 중국 허베이에서 창궐한 흑사병은 인구의 90%가 사망하였고, 1353–54년 동안 중국과 몽골 지역에서 2천 5백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 외의 영향

  • 문화적 영향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이 유행하던 1350년대, 문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음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역병은 사회적인 두려움을 조장하며 염세주의적인 사고가 확산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흑사병을 신의 심판으로 여기고, 이를 인간의 죄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였다. 특히 민간에서는 닥터 쉬나벨 폰 롬(로마 출신의 부리 가면 박사)이 흑사병 환자의 집을 방문하면 그 환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소문이 퍼졌다. 닥터 쉬나벨은 새부리 가면을 쓰고 긴 검은 겉옷, 검은 모자,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 유대인 혐오

흑사병의 유행 기간 동안 유럽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비난과 핍박이 나타났다. 다른 인종들은 병에 감염되어 죽는 가운데 유대인들은 잘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율법적으로 손을 자주 씻었기 때문에 병에 잘 걸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병을 퍼뜨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유럽에서는 유대인 학살이 발생하고,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더욱 격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