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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속으로] 프랑스 혁명 전쟁 - 진행과 전개

프랑스 혁명 전쟁 - 진행과 전개  |  혁명의 속도를 넘어

 

썸네일 - 프랑스 혁명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 혁명의 속도를 넘어

 

프랑스 혁명 전쟁

선전포고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우려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혁명 지지자를 탄압하며 1792년 대프랑스동맹을 맺어 혁명 정부를 압박했다. 혁명 정부는 대외 전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푀양파, 지롱드파, 그리고 루이 16세 등 각 계파는 각기 다른 이유로 전쟁을 원했다. 그러나 프랑스 군은 장교들의 망명과 미흡한 훈련으로 인해 전투에서 패배하며 군대가 해체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왕궁 습격 사건

     입법의회는 다급한 상황에서 선서 거부 성직자 추방, 국왕 친위대 해산, 연맹군(국민방위대) 창설 등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거부권을 행사하고 지롱드파의 대표들을 해임하자 시민들은 반발했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외국과의 내통을 의심하며 6월 20일에는 튀틀리 궁을 습격했다. 습격은 실패로 끝났지만 루이 16세는 모욕을 당하며 왕실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상퀼로트의 출현과 지방의 국민방위대가 파리로 집결하면서 혁명은 더욱 급진화되었고, 공공질서는 무너지게 되었다.

 

상퀼로트

     패전과 식량 부족, 인플레이션으로 파리의 민심이 타격을 입었다. 공채 아시냐 가치 하락과 물가 폭등으로 농민들이 곡식을 판매를 거부하면서 소요가 발생했다. 도시민들은 공정 가격제를 요구했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나타난 상퀼로트는 긴 바지와 붉은 모자, 창을 들고 다니며 도발적인 활동을 통해 공포정치를 조장했다. 이들은 대부분 참정권을 인정받지 못했던 무산 계급 출신으로, 자본 집중 반대, 민중 정치 참여, 평등 우선, 국왕 경멸, 국왕 거부권 폐지, 공화제 등을 요구했다. 상퀼로트의 활동은 혁명 초기의 급진적인 민중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8월 10일 사건

     7월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 군이 프랑스 영토로 침입하자 정부는 조국의 위기를 호소하며 의용군을 조직했다. 프로이센군 사령관의 협박적 선언은 시민들의 왕실에 대한 분노를 증폭시켰고, 이에 대한 시위가 발생했다. 혁명은 급진적으로 변화하며 상퀼로트, 자코뱅파, 코르들리에파 등이 파리를 장악하고 8월 10일에 왕실을 공격하여 군주제의 몰락과 공화제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루이 16세는 피신하고 국왕 일가는 유폐되었으며, 새로운 6인 임시내각이 형성되고 보통선거를 약속하며 국민공회의 구성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군주제의 몰락과 공화제의 탄생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9월 학살

파리에서는 상퀼로트들의 주도로 민중혁명이 급진화되며 자치체가 형성되었다. 왕당파 신문 폐간, 징발, 징집, 공정가격제 등의 법령이 이행되었고, 감시위원회와 비상 인민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선서거부파 성직자 추방, 종교의식 금지, 이혼 허용 등의 법령도 통과되었다. 그러나 8월 19일에 프로이센군의 국경 침공으로 인해 파리가 위기에 처하면서 시민들은 자원 입대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의용군 출정 전에 수감된 반혁명주의자들이 탈옥하여 가족을 학살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반혁명주의자들에 대한 학살이 결정되고, 9월 초에는 모든 감옥에서 반혁명 용의자로 의심되는 수감자들이 즉결심판을 거쳐 학살되었다. 또한 프랑스 전역에서 반혁명 용의자를 체포하고 특별형사재판소의 약식 재판만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일도 발생했는데, 이로써 살해된 사람은 대략 최대 1만 2천 명으로 추산되었다.

 

발미 전투

     1792년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프랑스와 프로이센군이 충돌하며 8시간에 걸친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 군은 의용군을 포함한 4만 7천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프로이센군은 3만 5천명이었다. 전투에서 프랑스 포병대의 집중 포격으로 인해 프랑스 군이 승리하고, 패배한 프로이센군은 국경을 넘어 퇴각했다. 이 승리 이후 프랑스는 다른 지역을 침공하며, 1792년 11월에는 벨기에를 점령하여 강제로 병합했다. 이로써 하층민 계급인 상퀼로트와 무산자들은 정치적 발언권이 높아지며 혁명이 더욱 급진화되었다. 상퀼로트는 자코뱅파를 옹호하며 혁명전쟁의 시작과 함께 발행된 아시냐 지폐의 증발과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미치는 등 혁명 시기의 중요한 사건들이 연결되었다.

 

 

 

공화국 성립

국민공회

     국경 지역에서 전쟁과 '9월 학살'이 발생한 가운데, 국민공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가 이뤄졌다. 선거에서는 모든 남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졌지만, 겁을 먹고 투표를 꺼리는 시민들로 인해 기권율이 높았다. 이로써 749명의 새 의원이 뽑혀 국민공회가 소집되었고, 1792년 9월 21일에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다음날 공화정을 선포하여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로 인해 1791년 프랑스 헌법도 단 1년 만에 폐지되었다.

     발미 전투의 승리는 공화정 출발에 큰 힘이 되었으며, 국민공회는 상퀼로트의 압력과 타협하며 어려운 상황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초기에 국민공회를 지배한 지롱드파는 160석을 차지해 공정가격제 거부와 경제 자유주의를 선호했다. 부르조아 출신으로 온건한 개혁을 선호한 지롱드파는 비상 재판소 폐지와 국왕 루이 16세(시민 루이)의 생명을 구하는 노력 등을 펼쳤다.

 

루이 16세 처형

     급진화된 혁명세력이 장악한 국민공회는 혁명의 후퇴를 막고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 루이 16세를 혁명 재판에 회부했다. 1793년 1월 14일, 국민 공회는 찬성 387 대 반대 334로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했으나 찬성 중 26표는 집행유예를 검토해야 한다는 조건부였다. 18일 집행유예에 대한 투표에서 찬성 380 대 반대 310으로 집행유예 없음으로 의결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1월 21일에는 파리의 혁명 광장에서 루이 16세가 단두대에 처형되었고, 이후 왕의 시신은 비밀리에 안장되어 마들레느 묘지에 묻혔다. 10월 16일에는 마리 앙투아네트도 손 묶인 채로 퇴비수레에 태워져 처형되었고, 국왕 사형 투표한 의원들은 이후 보복을 받았다.

 

대불동맹 전쟁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은 유럽 각국에 충격을 주며, 영국, 스페인, 사르데냐 등 11개국이 대불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 혁명정부를 적대시했다. 유럽 군주들은 무국왕의 아이디어를 막아야 했고, 대불동맹은 피트수상이 이끄는 영국이 주도했다. 이는 프랑스의 벨기에 침공과 합병이 영국의 대륙무역을 위협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대불동맹은 1793년 2월 1일 영국과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하며 제1차 대불동맹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불동맹 군대는 신속히 프랑스 국경을 넘었고, 전투에서 프랑스가 연패하자 혁명 정부는 "30만 명 모병"을 선포했지만, 이에 반발한 왕당파가 1793년 3월에 방데 반란을 일으키며 반란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프랑스는 벨기에에서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공포 정치

     1793년 6월 2일, 하층민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지롱드파가 식량 위기에 대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자코뱅파가 국민 공회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테러리즘과 공포 정치의 시기로 접어들었고, 자코뱅파는 독재 정치를 시작했다. 권력을 갖게 된 로베스피에르는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를 통해 반대파를 단두대로 보내고, 1793년 7월에는 농민에게 토지를 무상 분배하는 등 독립 소생산자에 의한 공화제 수립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테러가 증가하고, 아시냐의 지불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사형이 선고되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공포정치로 30만 명이 체포되고 15,000명이 처형되는 등 혁명 당시의 파리는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한편, 산토 도밍고에서는 1793년 8월에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된 국민 공회 의원이 노예제 폐지를 선언하는 등 자유와 평등의 원칙이 실현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

     로베스피에르는 혼란한 상황에서 공포정치를 통해 의견을 강제로 실현시키려 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부르주아와 일부 농민들의 저항이 커지면서 국민공회에서 탄핵을 당했다. 1794년 7월 27일에는 로베스피에르와 측근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이를 통해 혁명의 지도자들이 혁명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총재 정부

     1795년 로베스피에르의 처형 이후 국민공회는 공화력 3년 헌법을 제정하고 총재정부를 설립했다. 이 체제에서는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담당하고, 입법권은 원로원과 500인회에 근거한 구조였다. 그러나 반대파의 반란과 민심 상실로 총재정부는 실패하고, 1795년 10월 5일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 의해 일어난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으로 인해 진압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국민 영웅으로 등장하며 이탈리아 원정과 이집트 원정을 통해 주목받았지만, 총재정부는 경제와 사회적 불안에 대처하지 못하면서 민심을 잃게 되었다.

 

통령 정부

     1799년 브뤼메르 18일에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전복시키고 통령정부를 설립하여 제1 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프랑스 제1공화국은 나폴레옹의 지배로 인해 단 10년 만에 종결되었으며, 나폴레옹의 실패 이후 혁명으로 붕괴된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였다.

 

식민지 노예해방

     18세기말의 산도밍고(현 아이티)는 프랑스의 플랜테이션 식민지로, 흑인 노예들이 주로 설탕, 커피, 코코아, 담배를 생산하여 프랑스에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프랑스 혁명 소식에 영향을 받은 산도밍고의 흑인 노예들은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1791년 8월 22일에 시작된 봉기는 백인과 흑인 양쪽에서 많은 사망자를 낸 치열한 전투 끝에 흑인들의 승리로 이끌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산도밍고의 저항군은 영국함대를 격퇴하고 흑인과 혼혈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여 프랑스 시민으로 선포되었다. 1794년에는 프랑스 국민공회가 모든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제의 폐지를 선언하였고, 산도밍고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나폴레옹은 이에 반발하여 1801년에 재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804년에 산도밍고는 정식으로 독립하여 흑인 공화국이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시작된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자 북아메리카에서 노예제 폐지를 법령화한 국가가 되었다.

 

혁명 정신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자유와 평등, 박애가 슬로건으로 제시되었다. 혁명 과정에서는 세부적인 권리와 당면 문제들이 나타났으며, 이는 1789년 8월 26일 발표된 "프랑스 인권선언"에도 반영되었다. 선언문에서는 자유, 소유권, 안전, 저항권을 강조하며, 혁명의 여파로 1793년 제정된 '프랑스 헌법'과 1799년 12월 15일의 "통령 정부 선언문"에서도 자유와 평등, 안전, 소유권이 거룩한 권리로 강조되었다. 이 혁명 정신은 르네상스 이후의 인본주의 영향을 받아 인간존중과 인간존엄을 전제로 하며, 인도주의와 박애주의와도 연결되어 있다. 1875년 공화국 헌법에서는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자유, 평등, 박애가 강조되었다.

 

 

 

평가 및 영향

     프랑스 혁명은 세계를 뒤흔들었지만, 초기에는 지성적인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공포정치의 등장과 나폴레옹의 독재로 실망이 커졌고, 이에 대한 콜리지와 워즈워스 시인의 환멸도 나타났다. 영국의 존 웨슬리 신부는 혁명을 비난하며 말세의 시작으로 예언했고, 노예제 폐지 주장자인 윌리엄 윌버포스도 우려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왕조가 바뀌었지만, 그 이외의 의미는 없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귀족 중 일부가 혁명을 미리 감지하고 해외로 재산을 빼돌리기도 했고, 부르봉 왕가의 복귀로 귀족들은 몰수에 대한 배상을 받았기 때문에 인명 손실을 제외한 자산손실은 의외로 적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유일한 혁명 수혜자로 남았고, 귀족들은 국가나 왕에 대한 충성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프랑스는 영국과 독일에 비해 약세를 보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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