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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속으로] 프랑스 혁명 - 시작과 전개

프랑스 혁명 - 시작과 전개  |  풍요로운 왕정의 종언

     프랑스 혁명은 1789년 5월 5일부터 1799년 11월 9일까지 이어진 대규모 시민 혁명으로, 프랑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혁명의 주요 발단은 1789년 7월 14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민중의 불만과 봉건적 특권 계급에 대한 반발이 폭발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세습적인 왕정을 무너뜨리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을 폐지하며, 인권 선언 등의 개혁을 이끌었다.

 

썸네일 -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 풍요로운 왕정의 종언

 

     프랑스 사회는 이전의 절대왕정 아래에서 부상한 자본가 계급과 불만을 안고 있었다. 미국 독립혁명의 영향으로 자유의식이 강조되었고, 경제 불황은 봉건적 특권 계급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프랑스 혁명은 농민과 시민의 참여를 통해 민중혁명의 과정으로 전개되었고,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혁명의 성과로는 프랑스 국가 체제의 변화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등장을 통한 군사적 변화와 함께 유럽 전역에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리고 이후 80년간의 정치적 불안을 초래했으나,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인해 국가 체제가 계속해서 변화했다. 이 혁명은 자본가 계급이 권력을 쟁취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았으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념을 전 세계에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배경

     18세기 후반의 프랑스는 다수의 전쟁 참전으로 국가 재정 위기에 직면했고, 루이 14세의 통치로 기인한 재정난이 경제 불안과 결합하여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발전은 농민 해방과 공업의 자유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가속화시켰으나 귀족과 절대왕정의 저항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774년, 중농주의자인 재무총감 튀르고의 개혁 시도는 부르주아와 봉건적 귀족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프랑스 사회는 부르주아, 귀족, 그리고 노동자 간의 갈등으로 요동쳤으며, 18세기 후반에는 부르주아의 발전과 노동자의 투쟁이 동시에 활발히 일어나면서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계몽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은 국민은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혁명의 시발점을 마련했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의 씨앗이 심어졌다.

 

불평등한 사회 체제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앙시앵 레짐)에서 나타난 불평등과 부당한 세금 부담으로 인한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성직자와 귀족이 토지의 40%를 소유하면서 혜택을 누리는 반면, 대다수인 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 정치 참여를 위한 삼부회는 오랜 기간 동안 소집되지 않아 평민은 실질적으로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이러한 불평등과 부당함이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국가재정파탄

     18세기 후반, 루이 16세의 통치는 미국 독립 혁명을 지원하고 과도한 군사비로 재정문제에 직면했다. 선대의 향락과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가 재정을 악화시키면서 불평등과 불만이 증폭되었다. 1787년 제안된 임시지조에 대한 귀족과 성직자들의 저항으로 인해 세금은 폭등하였고, 흉년과 목걸이 사건은 민심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 혁명의 발전을 촉발하게 되었다.

 

민중의 사회 개혁 의지

     프랑스 혁명 당시, 부르주아 계층은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혈연과 교회의 권위를 뛰어넘어 부와 권력을 향유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계층은 계몽주의를 강력히 신봉하며 혁명에 참여했다.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장 자크 루소의 직접민주주의와 평등, 존엄성을 강조하는 이념에 기반하여 혁명에 참여하여 특권층에 대한 불평등을 거부했다.

 

명사회 개최

     1787년, 프랑스에서는 빵 부족과 물가 폭등으로 인해 민중의 불안이 높아져 폭동과 시위가 빈번히 발생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루이 16세는 명사회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재무부 장관 칼론은 국가 재정을 살리기 위해 인지세와 토지세 인상 등의 세제 개혁을 제안했으나 명사회 대다수의 반대로 인해 실패하고, 칼론은 1787년 4월 8일에 해임되었다. 후임 브리엔은 새로운 채권 발행과 곡물 거래 자유화 등을 승인하였고, 명사회는 5월에 해산되었다.

 

 

 

 

혁명의 전개

삼부회 소집

     1788년, 프랑스에서 명사회가 면세 특권층에 대한 세제 개혁안을 거부하면서 민중은 삼부회를 요구했다. 브리엔 재무부 장관이 국왕의 허락을 받아 삼부회를 소집했지만 재정 위기로 인해 국가 지불이 중단되고, 브리엔은 해임되고 네케르가 임명되었다. 네케르는 공채발행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했지만 부족하여 명사회는 해산되었다. 1789년 초에는 평민대표의 인원을 두 배로 늘리는 등 삼부회 대표 선출을 위한 선거가 열렸고, 5월 5일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가 열렸다. 그러나 삼부회는 초반부터 신분별 표결 방식 등을 놓고 의견 충돌로 난항에 직면하며 대립과 파행을 겪었다.

 

테니스 코트 서약

     평민 대표들은 1789년 6월 17일에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머리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아 분노하면서 회의장을 폐쇄당했다. 이에 평민 대표들은 6월 20일에 테니스 코트로 이동하여 국민의회를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헌법 제정까지의 서약문을 작성했다. 국민의회에는 로마 가톨릭 사제와 자유주의 귀족 47명도 참여하였고, 이후 7월 9일에 제헌국민의회로 명명되어 프랑스 헌법 제정을 시작했다.

 

바스티유 습격

     왕당파가 제헌국민의회를 탄압하려고 지방에서 군대를 모으는 소식이 전해지자, 1789년 7월 12일부터 충돌이 반복되었다. 7월 14일 아침, 파리 민중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얻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이 습격은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도화선이 되었고, 민중은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며 혁명에 참여했다. 파리 시내에는 바리케이트가 세워지고 자치위원회가 주도하여 바이이를 새로운 시장으로 선출했으며, 민병대 사령관으로 라파예트를 임명했다. 루이 16세는 군대를 철수시키고 사태 진정을 위해 노력했지만, 혁명은 지방으로 확산되어 도시들이 자치위원회와 국민방위대를 조직하며 국왕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농민반란

     프랑스 대혁명에 참여한 농민들은 총, 낫, 쇠스랑 등의 농기구를 이용하여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저항을 펼쳤다. 성을 약탈하고 문서를 불태우며 영주와 지주를 공격하는 등 전국적으로 대공포 수준의 폭력 행동이 발생했다. 그러나 삼부회나 국민의회(제헌의회)에서는 농민과 도시 노동자(프롤레타리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발언권이 제한되었고, 지방도시에서의 봉기에서도 자치위원회나 국민방위대를 조직할 때 무산계급(소작농과 노동자)은 배제되었다. 혁명과 제3신분의 대표선출에서는 주로 부르주아 출신이 주도하며 무산계급의 발언권은 무시되었다.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여 억눌린 욕구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측면이 있었다.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

     제헌의회(국민의회)는 민중과 농민의 급진적인 행동에 대응하여 8월 4일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였다. 이는 봉건지대의 한계가 있었지만 영주제와 농노제 폐지, 개인적 예속의 폐지, 소득에 비례한 세금납부 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제헌의회는 개혁을 지속하며 8월 26일에는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주권재민, 사상의 자유, 법앞의 평등, 재산, 투표, 과세의 평등, 소유권의 신성 등을 강조하여 혁명의 정의와 이념을 세웠다. 이 인권선언은 자연권과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미국의 독립 혁명을 반영하고 있다.

 

베르사유 행진

     루이 16세는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의 거부로 군대를 베르사유로 이동시켰다. 파리에서는 여러 신문이 창간되고 국민의회(제헌의회)는 헌법제정에 매진했다. 귀족들은 망명하고 직업이 사라지면서 실업자가 늘어났다. 대흉작으로 밀 수확량이 감소하고 빵값이 오르면서 시민들의 불만과 원망이 증폭되었다. 베르사유에서는 군인들에 의해 삼색기가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파리 시민들의 흥분이 다시 고조되었다.

     특히 여인들은 빵값 상승에 분개해 7천여명이 파리 시청으로 모여 "빵을 달라"라고 외치며 10월 5일 베르사유 궁전을 향해 행진했다. 국민방위대도 참여하여 군중이 궁전 앞에 몰리자 루이 16세는 당황하여 인권선언을 재가하려고 했지만 여인들은 파리 귀환을 요구하며 궁전에 난입했다. 국왕 일가는 파리로 이동하고 국민의회도 따라갔다. 이 시기의 혁명은 온건파 혁명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자유주의 귀족 라파예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790년에는 그의 제안으로 삼색기가 혁명의 깃발이 되었다.

 

사회 개혁 작업

     파리에 거주한 루이 16세는 사실상 입헌군주 역할을 하며 정치적 주도권은 국민의회에 의해 행사되었다. 정치 클럽이 활성화되면서 정치활동이 활발화되었고, 1790년에는 풍작으로 인한 시위와 소요가 줄어들면서 안정화된 민심 아래 다양한 개혁이 이뤄졌다.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직자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국유재산을 담보로 아시냐를 발행했다.

     교회 개혁은 1789년 11월 2일에 시작되었고, 수도원 해체와 1790년 7월 성직자 기본법 제정으로 성직자를 국가 공무원화하고 국가가 성직자를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변화했다. 성직자들에게 선서를 요구하자 교회 일부 세력은 저항하며 교황 비오 6세도 비난했습니다. 이로 인해 양국 외교는 단절되었다.

     길드(동업조합)폐지, 사법부 개혁, 조세제도 개편, 행정구역 재조직 등 다양한 개혁이 이뤄졌고, 재산 제한 선거제 도입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평민(남성)들도 선거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공채 아시냐는 재정 확보에는 기여했지만 인플레이션과 경제의 악화를 초래하며 의회 내에서는 개혁파 정치세력 간 분열이 발생했다. 지방에서는 독일 제후들과의 영토분쟁, 아비뇽 및 남부지방에서의 소요가 있었고, 외국 군주들은 프랑스혁명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망명한 프랑스 귀족들은 외국에서 혁명에 대한 불안감을 조장했다.

 

 

 

 

 

바렌 사건

     혁명 발발로 귀족과 성직자들 중 국외 망명자가 늘면서 국왕은 국내세력에서 약해졌다. 1791년 4월, 중개자 미라보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분 있는 스웨덴 귀족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오스트리아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791년 6월 20일 파리를 탈출한 루이 16세 일가는 발각되어 6월 25일 파리로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루이 16세의 반혁명 의도가 드러나자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고 루이 16세의 왕권을 중지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의회 내부 갈등으로 7월 15일 루이 16세의 권한이 복위되었지만 반발이 일어나 7월 17일에는 국민방위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는 샹 드 마르스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동시에 외국 군주들은 프랑스의 혼란을 이용해 왕권 복위를 시도했고, 레오폴트 2세는 파두아 회람과 필니츠 선언으로 국민의회를 압박했지만 이는 오히려 국민들의 반감을 증폭시켰다. 이로 인해 루이 16세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이 커지면서 남아있던 충성심도 사라졌다.

 

입법의회

     1791년 9월 3일에 공포된 새로운 프랑스 헌법은 제한 선거와 입헌 군주제를 핵심으로 채택했다. 이 헌법을 기반으로 같은 해 10월에 실시된 첫 번째 선거에서는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입법의회라는 새로운 기관이 형성되었다. 이 의회는 중도파가 340석, 온건파인 푀양파가 240석, 자코뱅파가 130석을 차지하여 구성되었다. 푀양파는 주로 의사당의 우측에 앉았고, 자코뱅파는 주로 좌측에 앉아 우파와 좌파로 불리는 관행이 형성되었다.

 

장교들의 반발

     프랑스 군대의 장교들은 새로운 헌법과 의회에 대한 맹세를 해야 했는데, 이 맹세는 군의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 군대의 장교 자격은 귀족가문 출신에게만 주어졌으며, 많은 장교들이 혁명을 반대하고 왕당파를 지지하여 입헌군주제에 반대했다. 결과적으로 상당수의 장교들이 집단적으로 전역하고 망명귀족들과 합류하여 국외로 탈출하게 되었다.

 

가톨릭의 저항

     프랑스 혁명은 주로 봉건 왕조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가톨릭교회를 타깃으로 삼았다. 시민들은 여러 지역에서 가톨릭 교회를 공격하고 성상을 파괴하여 앙시앵 레짐을 상징하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이에 따라 로마 가톨릭교회는 혁명에 강하게 저항했으며, 교종을 동원하여 프랑스 혁명을 억누르기 위해 가톨릭 군주들에게 군대 파병을 요청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동원하여 반혁명적 활동을 조장했다. 경제 악화로 이어진 프랑스 혁명에서 가톨릭교회는 시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사례가 방데 반란으로, 이 반란은 많은 희생자를 낸 뒤 진압되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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