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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속으로] 카노사의 굴욕

카노사의 굴욕  |  권력의 혼돈과 변혁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of Canossa, Road to Canossa)은 1077년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이다.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을 둘러싸고 독일왕과 교황이 서로 대립하던 중에 발생하였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중세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동안 성문 앞에서 3일 밤낮을 기다리며 무릎을 꿇고 간구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중세 기록가와 현대 역사가 사이에 이 사건이 황제에게 굴욕적인 패배였는지, 아니면 '훌륭한 대작'이었는지에 대한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배경

     1073년에 로마 사람들에 의해 추대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강력한 교회 개혁과 쇄신 운동을 펼쳤는데, 그는 법령에 따라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을 다시 교회로 가져오는 개혁을 실행하려고 했다. 독일왕 하인리히 4세는 이에 저항하며 교황령에도 불구하고 주교, 수도원장, 기타 성직자들을 ‘서임’할 수 있는 전통적인 황제의 권리를 유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75년 6월 랑엔잘차 전투에서 하인리히 4세가 색슨족의 반란을 진압한 후 분쟁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9월에 그는 밀라노의 새로운 주교를 임명했는데, 이는 공개적으로 복종을 요구하는 그레고리우스 7세를 짜증 나게 했다. 1076년 1월 24일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에서 열린 종교 회의에 몇몇 독일인 주교들을 소집했는데, 그곳에서 교회의 고위 인사들은 교황에 대한 서약을 모두 포기했다. 국왕은 마침내 그레고리우스 7세의 퇴위를 요구하며 1059년 도미니블 공작 후보의 교황 선거 규칙을 언급했다.

     이에 대응하여 그레고리우스는 1076년 로마에서 열린 사순절 대회에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해임시켰다. 나아가 그날로부터 1년 후에는 왕권의 상실은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또한 귀족들이 맹세한 충성 맹세는 무효라고 선언했고,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와 교황 사절이 트레브루에서 독일 귀족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1년 안에 금지령이 해제되지 않으면 하인리히를 4세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독일 귀족의 더 많은 반란을 두려워한 하인리히는 자신의 파문 처분을 없애야 한다고 느꼈다. 그는 여전히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귀족들은 새로운 왕을 선택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교황이 정한 기한 전에 교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해야 했다. 하인리히 4세는 고문들의 제안에 따라 그는 알프스를 넘어 교황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다.

     하인리히는 슈파이어에서 여행을 시작했고, 라인강을 따라 남쪽으로 여행 하면 자신의 입지가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슈바벤 귀족들이 알프스 고개로 가는 길을 열어주기를 거부하자 왕은 부르고뉴를 지나 가파른 몬트 세니스로 알프스를 넘어야 했다. 헤르스펠트 람베르트의 연대기에 따르면 하인리히와 그의 아내 사보이아의 베르타, 그리고 그들의 어린 아들 콘라트는 혹독한 한겨울 조건에서 알프스를 넘으며 목숨을 걸었다. 긴 여행 후에 그들은 1077년 1월 25일에 카노사에 있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머물고 있는 카노사 성문 앞에 도착했다.

 

 

 

 

경과

     하인리히가 마틸다의 성에 도착했을 때, 교황은 그에게 출입을 거부하라고 명령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리히는 참회의 행동을 취했다. 그는 당시 수도사들이 입는 고해복을 입고 맨발로 걸었다고 한다. 사보이아의 베르타 여왕과 왕자 콘라트를 포함한 그의 수행원 대부분도 신발을 벗은 것으로 추정된다. 헤르스펠트의 램버트와 그 현장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그레고리우스와 하인리히가 이듬해에 쓴 편지)에 따르면 왕은 3일 동안 문 옆에서 기다렸다. 그동안 그는 참회하는 고해복만 입고 금식했다고 한다.

     1월 28일, 드디어 성문이 열렸고 하인리히 4세가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그레고리우스는 하인리히를 용서하고 그를 교회로 다시 초대했다. 그날 밤 토스카나의 그레고리우스, 하인리히, 마틸다는 성 안의 산타폴로니오 예배당에서 미사에 참석함으로써 하인리히에 대한 교황의 파문의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하인리히가 실제로 공식적인 회개를 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어쨌든, 그는 파문이 취소되자 곧바로 독일로 돌아갔고, 그레고리우스는 마틸다와 함께 몇 달 동안 토스카나의 다른 곳에 머물렀다.

 

 

 

 

사건 이후

     카노사 회의의 직접적인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하인리히는 교회에 복귀했지만 교황이 하인리히의 왕위 계승권에 대한 지지를 회복할 것이라는 기대는 곧 무너졌다. 3월 잘츠부르크, 마인츠,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와 몇몇 주교들을 포함한 강력한 색슨족과 남부 독일 영토의 대부호들이 포르히하임에서 만났다. 그들은 하인리히가 황실의 위엄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실했다는 가정하에 세습을 통해 왕위를 계승하겠다는 살리안 왕조의 주장을 부정하고, 주교 수행단에 참석한 메르세브르크의 브루노는 "왕의 아들이 탁월한 인물일지라도 자발적인 선거를 통해 왕이 되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독일의 제후들은 라인펠트의 루돌프를 황제로 추대했고 하인리히는 루돌프와 내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는 중재를 하려 하였으나 양쪽에서 모두 비난을 받았다. 교황은 1080년 하인리히를 다시 한번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가 내전에서 승리하여 귀족들을 굴복시키자 교황의 파문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권력 장악에 성공한 하인리히 4세는 1080년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카노사의 성주 마틸다를, 1084년 3월에 로마 탈환에 성공한다.

 

 

의의

     하인리히 4세는 굴욕을 맛보았으나 독일에서의 권력 장악에 성공한 후 1084년 로마를 탈환하여 교황을 폐위하며 복수를 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로마를 떠나 이듬해 망명지에서 쓸쓸히 객사하였다. 카노사의 굴욕은 세속 군주가 굴욕을 맛본 대표적인 사건이자, 교황 권력이 황제 권력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전환기에 벌어진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