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세계사

[세계사 속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  권력, 전략, 그리고 로마의 역사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또는 줄리어스 시저는 고대 로마의 통치자, 정치인, 장군이다. 로마 공화정을 뒤엎고 로마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의 군사 및 정치적 업적은 고대 로마를 변혁하고 지금도 계속되는 유산을 남겼다.

 

썸네일 - 율리우스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권력, 전략, 그리고 로마의 역사

 

유럽에서 로마의 지배 확대

     기원전 58년에 로마의 북부 영토인 갈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된 후,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국의 국경을 광범위하게 확장했는데, 유럽을 가로질러 대서양과 영국 해협의 연안까지 이르렀다. 피비린내 나는 8년간의 갈리아 전쟁 동안 그의 군대은 현재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의 지역 부족을 정복했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의 군대는 라인강에 목재 다리를 불과 열흘 만에 건설했다. 그리고 로마 군대는 동부 갈리아를 위협하는 독일 부족을 제압하기 위해 사상 처음으로 수로를 횡단하여 진군했다. 그해 말에는, 영국 해협을 횡단하는 두 번의 원정 중 첫 번째를 지휘했다. 이러한 영국에 대한 초기의 침략은 로마가 최종적으로 섬의 대부분을 정복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

 

 

 

'루비콘 강'을 건너

     카이사르는 뛰어난 전장 전술과 전투 의지을 통해 병사들의 존경과 충성심을 얻었다. 그는 사실상 로마를 지배한 제1차 삼두 정치의 정치적 동맹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질투를 샀다. 로마 원로원의 폼페이우스 지지자들이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민간인으로 로마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을 때 그는 이를 거부했다.

     대신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용감하게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갈리아와 로마를 나누어 내전을 촉발시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며

Ālea iacta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고 말했다.

     한쪽에서는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군대, 다른 한쪽에서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군대가 스페인, 그리스, 북아프리카까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비록 카이사르의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기원전 48년 그리스 파르살루스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격파했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가 해변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그는 10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명령으로 암살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의 내전에서 카이사르의 지원을 요구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 내전은 공동 섭정이자 누이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왕좌로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을 때 프톨레마이오스는 폼페이우스의 수급을 선물했지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에 슬퍼하며 분노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암살자를 즉시 처형하고 이집트 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의 편에 섰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일어나고 적지에서 소수의 병력밖에 없었던 카이사르는 위기를 겪지만, 결국 원군이 도착하면서 카이사르의 군대는 나일강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를 물리쳤다. 젊은 왕이 전투에서 도망치다가 나일강에서 익사한 후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12살 이복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섭정으로 임명했지만 여왕이 진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독재자로서 로마 통치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와 로마 평민(비엘리트 시민)의 지지에 힘입어 엄청난 힘으로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에서 벗어났다. 기원전 48년 말, 독재관으로 임명된 카이사르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가서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이 지역을 평정하였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그는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

veni vidi 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라고 적었다.

     로마로 귀국하여 집정관에 선출되어 유일한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방대한 개혁을 실시하는데, 은퇴하는 군인들에게 재산을 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부채를 탕감하는 식의 카이사르의 대대적인 개혁은 군대와 로마의 하층계급이나 중산층에게 인기가 있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개혁을 마친 뒤, 종신 독재관에 취임하여 자신을 임페라토르(최고사령관)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권세와 절대 권력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과 공화정 전통을 무시했고, 그의 개혁은 엘리트들을 화나게 했다. 그의 모습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하고, 자신의 생일을 국경일로 삼고, 황금 왕좌에서 원로원을 통치하면서 카이사르에 대한 숭배가 형성되었다.

 

 

 

 

죽음과 로마 제국의 대두

     카이사르의 독재는 로마 제국의 서막을 알렸다. 카이사르의 절대 권력 집중이 공화국의 민주주의 기관들을 위협한다고 믿었던 수십 명의 원로원들이 그의 살해를 계획했다. 그것은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실행되었다.

     카이사르의 암살은 400년의 역사를 지닌 로마 공화국을 구하기는커녕 그 종말을 가속화시켰다. 독재자를 저지하려는 원로원들의 시도는 의도치 않게 황제를 만들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는 적들을 숙청하고, 카이사르의 암살자를 살해하고, 공화주의자들을 진압한 후 오랜 내전을 거쳐 로마의 최고 지도자로 등장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를 신격화했고 약 5세기 동안 지속된 독재적인 로마 제국을 열었다.

 

 

 

 

[세계사] 로마의 발전과 문화

로마의 발전과 문화 로마 공화정의 성립 기원전 8세기 중엽에 라틴인은 이탈리아 중부에 도시 국가 로마를 건설하였다. 처음에는 에트루리아 출신 왕의 지배를 받는 왕정이었으나, 기원전 6세기

bigdipper.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