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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계사

[세계사] 비잔티움 제국

비잔티움 제국 

 

썸네일 비잔티움 제국
비잔티움 제국

 

비잔티움 제국의 발전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로마 제국의 전통을 게승하며 약 1000년간 더 유지되었다. 후대 학자들이 사용한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이름은 수도의 옛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 세력에 맞서 크리스트교 세계를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하면서도 서유럽 세계와 경쟁하였다. 서유럽 세계에서는 교황권과 황제권이 분리됐지만,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황제가 교회의 수장을 겸하는 황제 교황주의가 발달하였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길목여 위치하여 동서 교통의 중심지이자 상공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비잔티움 제국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서고트족이 지배하던 에스파냐 남부 지역을 공격하여 일부를 점령하였으며,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본토, 시칠리아, 코르시카 등 옛 로마 제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 하였다. 또한, 로마법을 정리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성 소피아 성당을 건립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은 12세기에 서유럽으로 전해져서 중세 사회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 외침이 거듭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제국을 31개의 군관구로 나누고 둔전병제를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자영농을 육성하여 군사력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것으로, 국방력 강화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8세기 무렵에는 발칸반도 남부와 소아시아 일부로 영토가 축소되었다. 9세기 후반부터는 이슬람 세력이 분열되자 빼앗겼던 영토 일부를 회복하는 등 부흥을 꾀하였으나 지방의 유력자들이 토지를 사유화하면서 둔전병제가 점차 무너지고, 대토지 소유자가 봉건 영주화함에 따라 황제권도 약화되었다. 11세기에는 셀주크 튀르크의 침입으로 소아시아 지역을 빼앗기자 서유럽 세계에 구원을 요청하여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 이후 제4차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당하는 등 시련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결국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다(1453).

 

비잔티움제국 지도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의 발전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 정교를 바탕으로 그리스·로마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를 융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하였으며, 그리스 고전의 수집과 연구가 이루어져 고대 그리스의 사상과 학문이 보존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고전 연구의 성과는 서유럽 세계에 전파되어 르네상스를 자극하여 유럽의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적 특징은 건축과 미술 분야에서 잘 나타난다. 비잔티움 건축은 외부의 웅장한 돔과 내부를 장식한 화려한 모자이크화 등이 특징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과 페르시아의 돔 양식이 결합된 비잔티움 양식의 대표적인 성당이다. 그 밖에 금은 세공품, 상아 세공품, 유리 제품 등을 통해 비잔티움 예술의 높은 수준을 알 수 있다.

     비잔티움 문화는 슬라브족에게 전해져 러시아와 동유럽 문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유럽의 동북부에 살던 슬라브족은 비잔티움 제국 내로 들어와 살면서 비잔티움 제국 문화에 동화되었다. 이들은 키릴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키릴 문자로 번역된 성서를 바탕으로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였다. 러시아의 키예프 공국은 흑해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과 교역하며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키예프에 성 소피아 대성당을 세우기도 하는 등 비잔티움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 소피아 성당의 모자이크화
출처 - MiraeN 고등학교 세계사